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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9.17 (마마마) 마미호무
  2. 2018.09.17 (롤) 카타리나 & 럭스
  3. 2018.09.17 (이영싫) 메두다나
Backup - etc2018. 9. 17. 03:03


마수 처치에 대해선 베테랑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마미조차도. 일정 수를 넘는 마수 무리들에게 포위되는 상황에서는 도주를 우선하고는 했다. 혼자의 몸으로 감당키 어려운 수의 마수와 싸우는 것은 사실상의 자살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아케미 호무라는 활을 들고는 했다. 그녀의 의무는 마수를 쓰러뜨리고 세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일찍이 존재했던 한 소녀, 카나메 마도카가 사랑했던 세계를 위해. 하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의 의무로부터 탈출하고 싶다는 유혹에 매 순간 활을 놓기를 소원했다. 마수와의 사투 끝에 자신의 최후를 맞는 것은 가장 이상적인 결말. 하지만, 그래서는 늦는다. 매 순간 그녀는 마도카로부터 멀어진다. 마도카의 흔적과 의지는 이제 그 어느 곳에서도 느껴지질 않았다. 그저 다른 마법소녀가 원환되는 그 마지막 순간에나, 마도카는 실존한다고 겨우 실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아케미 호무라에게 있어 최대의 비극이었다. 삶의 근원을 잃는 것과 같은 상실감. 더 이상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욕과 열의 그 무엇 하나도 없이 그저 호무라는 마수를 죽이는 기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결국은 부서져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그런 기계. 그러나 그런 모습은 호무라 자신 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상태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쿄코는 협력을 거부했다. 자살신봉자에게 등을 맡길 수는 없다고 단언한 그녀는 홀로 행동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마미와도 멀어지게 되었다. 이제와서는 카자미노 시와 미타키하라 시 양 쪽을 오가며 마수 퇴치를 반복하는 모습만이 간혹 보일 따름이었다. 어쩌다 마주치더라도, 비웃듯이 말을 걸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 자살신봉자는, 그래. 아직도 안 죽었어?'



반면 토모에 마미는. 사람을 버리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 아케미 호무라와의 동행이 이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미는 차마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꼭, 손을 놓는 순간 사라져 버릴 모래알 같은 존재였다. 몰랐다면 할 수 없지만 이제는 마미의 눈 앞에 놓인 사람이다. 그녀가 구제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아케미 호무라를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를 돕고싶어.' 



그것이 마미의 의지였다. 토모에 마미의 근간은 선업(善業)이다. 아케미 호무라의 근간이 마도카, 이제는 실전된 현상이라면 마미의 근간은 마법소녀의 행위 그 자체였다. 다른 이를 구하리라. 마미의 목적은 단순했고 따라서 호무라에게 행해지는 관심 역시 언제나 선의에 근거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마미의 도움은 호무라에게 있어선 또 다른 비극과 다를 바 없었다. 



"아케미 양?"



지칠 줄 모르는 끝없는 관심. 그것은 밀어내고 거부하고 무시해도 사라지는 일이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호무라는 마미의 모든 관심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했다.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리 했으리라. 



"...잠깐. 제대로 잠은 자고 있는 거니? 많이 피로해보여."



'아무래도 좋잖아.'라는 생각은 호무라의 안에서 맴돌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 사람은 그런 단순한 거부의 반응에 기뻐한다. 적어도 아직은 대화할 의지가 있다고 판단하고 2차적인 추궁에 들어올 것이다. 이제는 거북하다 못해 경멸이 일 정도의 그런 선의는 호무라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등을 돌린다. 그것으로 대답이 되었기를 바라며, 호무라는 마미에게서 떠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이 실책이라면 실책이었을 것이다. 토모에 마미는 생각보다 끈질긴 사람이었다. 마미는 분명 버려지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허나 어느 순간부터, 마미는 버려짐에도 불구하고 추격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게 되었다. 호무라의 영향이었다. 이제는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동료에게마저 버려지는 현실을 참지 못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마미는 이제 내쳐질 걸 알면서도 손을 뻗게 되었다.



탁, 하는 작은 소리. 호무라는 깜짝 놀라 팔을 내쳤다. 토모에 마미가 신체적인 접촉을 꾀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에 상정하지 않았던 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로 호무라는 마미에게 잡혔던 제 왼팔을 등 뒤로 숨겼다. 



"...뭐하는 짓이지, 토모에 마미."



서둘러 숨기기는 했지만 호무라의 당황한 반응은 마미에게 어떠한 영양분을 제공한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행동으로부터 '응답' 받았다는 기쁨 덕인지, 표정이 한층 밝아진 그녀는 손에 들고있던 물건을 호무라의 눈 앞에 내밈으로써 한 번 더 호무라를 당황시키는데 성공했다.



"아케미 양, 밥도 제대로 챙겨먹고 있지 않지?"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지는 정적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조적인 투로 말을 이었다. 



"도시락이야."



마미의 눈짓에도 불구하고. 호무라는 제 팔을 앞으로 내밀지 않았다. 도시락을 받고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도 있고. 무엇보다 마미에게 들키지 않게 해야 할 것이 있었다. 자신의 이러한 행동이 토모에 마미를 상처 입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호무라는 끝내 마미의 친절을 거부했다.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그게 너의 대답이니?"



호무라는 천천히 마미를 응시했다. 마미 역시 지쳐있는 듯 했다. 목소리엔 힘이 없고 얼굴엔 피로한 기색이 가득했다. 팔다리는 힘없이 그저 늘어져있는 게 전부다. 어쩌면 자신의 몰골 역시 이러할 지도. 아니, 더 심하면 심했지 이보다 덜하진 않으리라. 그런 자조 섞인 감상을 품는 것도 잠시. 호무라는 뇌리를 스치는 강렬한 자극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머지 않은 곳에서 끔찍할 정도로 어두운 저주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수다. 마미 역시 그 기척을 느낀 듯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은 이렇다 할 말도 없이 자리를 박찼다.



토모에 마미와 아케미 호무라 둘은 굴지의 베테랑 마법소녀다. 둘이 힘을 보탠다면 마수를 처치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이 평상시의 두 사람이었다면. 문제는 호무라에게 일어났다. 그녀는 마수의 협공에 평소보다 한박자 늦은 반응으로 대응했다. 토모에 마미가 만전의 상황이었다면, 이러한 호무라의 분만큼 조금 더 많은 활약을 함으로써 싸움의 평형을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마미 역시 결코 좋다고 할 만한 몸상태가 아니었다. 제 앞가림을 하는 데에만 전력을 쏟아붓는 채, 닥쳐오는 마수의 공격을 쳐내고 반격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케미 호무라가 쓰러지는 건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무력화된 호무라는 삽시간에 추락했다. 이 모습이 마미의 어떤 면을 자극했는지는 모른다. 반격하는 것도 힘에 부쳐보이던 마미는 곧 무지막지한 화력으로 마수들을 일격에 쓸어버리고, 호무라를 향해 서둘러 달려갔다.



"...손 대지 마."



"가만 있어줘. 특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아케미 양보단 내 회복 마법이 더 뛰어나." 



그 말에 설득당했는지도 모른다. 호무라는 곧 저항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기절하거나 잠든 것은 아니고 그저 품에 안긴 채 마미를 올려다보는 게 거북한 모양이었다. 



"아케미 양 답지 않았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마치 큰 부상을 입은 채로 억지로 몸을 움직이는 듯한 굼뜬 모습이었다고. 그렇게 묘사하면서, 마미는 한 손을 호무라의 배 위에 얹었다. 따뜻한 노란빛의 마력이 마미의 손으로부터 발현된다. 치유가 진행되는동안 호무라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얌전히 안긴 채 눈을 감고있었다. 그 모습이 꼭 편안히 잠든 것만 같아서, 마미는 내심 그 순간이 지나가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미키 사야카가 원환되고 사쿠라 쿄코가 떠나간 이후로 두 사람은 이런 편안한 분위기로 있어본 일이 없었다. 관계는 파국을 맞은 듯이 억지로 뒤틀려져서 긴장된 상태만이 지속 되었을 뿐.



외견상 보이는 문제는 별로 없었다. 호무라가 정도 이상으로 지치고 피로해 보이긴 했지만 그건 어느 순간부터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의욕이라곤 없는 파리한 모습으로 걸어다니고는 했다. 그렇지만 마수와 싸우는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때보다 생기 있었기 때문에 사실 큰 문제는 되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있었다. 잘못된 판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제 생각을 고치면서, 마미는 재빠르게 호무라의 상태를 점검했다. 



본인이 눈을 감고 있는만큼 이런 기회가 언제 주어질지 모른다. 



'이 정도로 순종적인 아케미 양은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네.' 



호무라의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면서 마미는 새삼 감탄했다. 차갑기만 하던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확 달라졌다. 머릿결은 곱고 얼굴은 단정하니 예뻐서, 이렇게 정면으로 얼굴을 뚫어져라 보게된 일이 처음인만큼 감탄도 일었다. 아케미 호무라는 확실히 미인이었다. 다만 지금은 몸의 피로가 누적된 듯 안색이 창백하고 눈 밑이 거뭇거뭇 한 것이 흠이었으나 잘 먹고 잘 자게 된다면 금방 회복할 수 있으리라. 몸의 선은 얄상하고 품 안에 들어온 무게는 가볍기 그지 없었다. 가녀린 뼈대와 어깨선이 그대로 느껴졌고 조금만 강하게 압박하는 것으로도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으리라는 실감이 들었다. 곧게 뻗은 콧대와 창백하게 질린 입술. 한 손에 잡힐 듯한 얇은 목, 여린 어깨선을 지나 호흡을 따라 오르내리는 가슴, 배, 힘없이 늘어뜨린 가느다란 팔과 다리 등. 관찰을 멈추지 않던 마미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이르렀을 때. 마미의 눈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아케미 양, 이건..."



목소리가 흔들려나온다. 이와 더불어 자신을 받치고 있던 마미의 팔이 불안정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고. 눈을 번쩍 뜬 호무라는, 곧바로 마미의 손을 벗어나 제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왼팔을 뒤로 숨기며 작게 혀를 찼다. 가장 들켜선 안될 사람에게 좋지 않은 것을 들켜버렸다. 



"소울젬이!"



"내버려둬."



말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호무라는 그저 제 손을 숨기는 걸로 밖에는 대응할 수가 없었다. 마미가 따라서 몸을 일으킨다. 좋지 않은 여건의 몸상태로 마미에게서 도주할 수 있을까. 만전의 호무라였어도 힘드리라. 하물며 지금은. 



"아케미 양. 왼손을 보여주겠어."



"안돼."



"지금 내가, 허락을 받으려고 묻는 걸로 보여?"



무의미한 문답은 거기까지였다. 호무라는 기습적으로 활을 소환해내면서. 활시위를 당겨 마미를 겨누었다. 보랏빛을 머금은 마력의 화살이 당장이라도 쏘아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 채로 활대를 벗어나고자 준동한다. 활시위를 당기는 바람에 얼핏 보여진 왼손의 소울젬은, 가히 '어둡다'라고 칭할 수 있을만큼 검게 물들어 요동치고 있었다. 평소 그녀가 지니고있던 영롱한 밝은 빛은 이미 태반이 죽어 검은 파동에 갉아먹혀 그 생기를 잃고있었다. 명백히 소울젬이 한계에 달한 상태다.



"소울젬이 이렇게 될 때까지 정화하지 않았던 거니?"



"...더 이상 다가오지말아줘."



지금도, 앞으로도.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마미는 한걸음을 내딛었다. 핑,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이 춤을 추듯 내달려와 마미의 귀를 찢으며 지나간다. 이 압도적인 빠르기. 단순한 위협사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다한 것이 분명했다. 찢겨져나간 귓볼을 매만지면서, 마미는 그제서야 납득했다. 오늘따라 한 박자 느린 호무라의 움직임, 도시락을 건네주기 전 왼손을 잡혔을 때 보인 그 날카로운 거절, 지금에 와서 이렇게 명백하게 적대적 의지를 표명하는 이 모습은 전부.



아케미 호무라는 원환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정화를 거부했다.



그제서야 의문들이 해결되었다. 그녀가 이전에 자신을 향한 호의와 관심을 거부한 것. 쿄코가 '자살신봉자'라고 칭하며 거리를 두었던 것, 마미의 조언이나 도움을 거절하다 못해 싫어하던 모습 전부가. 사실은 자신의 종말을 바라서였다고.

그런 모습,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사람이 죽는 것을 지켜보라고. 이전의 쿄코라면 때려서라도 말리지 않았을까. 지금은 호무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마미 자신 밖엔 없다. 이 시점에서 생각을 마치고, 마미는 팔을 휘둘러 순식간에 대량의 리본을 소환해냈다. 



이 명백한 적대적 태도에. 호무라 역시 이를 악 물며 전투의 채비를 갖춘다. 오염 직전의 소울젬으로 남은 마력이라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의 정도 밖에 없는 아케미 호무라. 다소 피로하긴 하지만 충분히 여지가 있는 토모에 마미. 결착을 짓는 데는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더 이상의 마력 소비 자체를 금하겠다는 듯이 리본은 순식간에 호무라를 억죄고 들어와 그녀의 신체적 자유를 박탈시켰다. 



"왜. 왜 정화하지 않으려는 거야?"



여기까지 와서 문답을 나누려고 하나. 호무라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원환의 이치와 마도카, 그 둘 사이의 연계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리 한다고 해서 마미가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 어떤 시점에 어떤 방법을 써도, 토모에 마미와는 좀처럼 대화가 통하는 일이 없었다. 피곤할 정도로.



"...아케미 양?"



어떤 말에도 돌아보는 일 없이. 호무라는 그저 시선을 피한 채로 입을 다물었다. 이 모습이 마미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녀는 다시 한 번 거부당했음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호무라의 이름을 부르던 것도 잠시. 마미는 곧 정신을 차린 듯이 덩달아 입을 다물곤 사방에 흩어진 채로 내버려져있던 큐브를 주워모았다. 마미는 가득 모은 큐브를 품에 진 채로 다가와서, 호무라의 왼팔의 결박만을 가벼이 풀어내었다. 



"잠, 하지마...!"



"...이유를 알려줄 수 있겠어? 아케미 양."



말미를 주듯이 묻는다. 호무라는 제 앞에 선 마미와 그 품안의 마수의 흔적들을 바라보면서, 흔들리는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말한다고 해도, 당신은 이해 못 해."



"...그래?"



그럼 나도. 더 이상 말 하지는 않을게. 중얼거리는 것을 끝으로, 마미는 제가 들고있던 큐브들로 순식간에 호무라의 소울젬을 정화해내기 시작했다. 소울젬을 갉아먹던 검은 탁류는 큐브에 의해 빨려나가며 차츰차츰 제 안에 품고있던 보랏빛을 드러내며 넘실대고 있었다. 제 몸을 구속한 리본과 마미를 원망스레 쳐다보면서, 호무라가 저항하기 시작했다. 소울젬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그녀의 저항은 거세져서, 그만큼 마미의 구속 역시 더욱 강력하게 호무라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제 몸을 억죄는 고통과 소울젬이 정화되어간다는 사실 앞에 발버둥 치는 호무라의 노력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의미 해져간다. 차갑게 내리앉는 적막 속에 오로지 소울젬과 큐브만이 어둠을 집어삼키며 빛나고 있었다. 호무라의 소울젬이 거의 완벽하게 밝아지고, 오염을 흡수하는 일을 대충이나마 마쳤을 때. 그제서야 마미는 전부 소모한 큐브들을 땅에 내버리며 작게 웃었다.



"...만족해...?"



작은 소리로 들려오는 물음은 꼭 울음과도 같이 울려온다. 제 두 눈에서 일렁이는 눈물과 절망을 뱉어내면서, 호무라가 입술을 짓씹는다. 항상 차가운 가면과 벽을 쳐놓고 먼 거리에서나 일렁이던 그 눈빛이. 마미와 만난 이래 가장 솔직하고 담백하게 호무라의 마음을 담아내 빛나고 있었다. 



"이거 봐, 아케미 양. 할 수 있었잖아, 우는 거."



"...토모에 마미."



왜? 아케미 양. 상냥하게 웃는 그 미소가 오싹할 정도로 가증스러워서, 호무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눈물만이 넘실대며 리본 위로 똑똑 떨어져 내렸다. 저항이 덜해진 만큼 리본의 압박은 줄어 들었지만 호무라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저 마미만을 일렁이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해줄게 아케미 양. 몇 번이든."



당신이 죽게 하지는 않을 거야. 차분하게 미소지으면서, 마미가 손을 뻗는다. 호무라의 눈물 젖은 볼을 어루만지면서 마미가 작게 입을 열었다.



당신을 지켜줄게. 













-15.05.21

Posted by 까망베르 베베
Backup - etc2018. 9. 17. 03:00

광휘?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주제에 눈속임으로 번쩍 거리기나 하는 그런 조잡한 마법은 부숴지는 것으로 그 가치를 다할 따름이다. 그 어떤 조예도 미학도 없는 단순하고 맹목적인 이 투박한 빛줄기는 마치 무예를 비웃는 듯 가벼웠다. 직선적으로 날아드는 포박형 마법을 가볍게 피해내면서, 카타리나는 그 같잖은 저항을 비웃으며 턱을 까닥였다. 군인이랍시고 지팡이를 치켜든 금발의 어린 소녀가, 땀과 피에 젖어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서있는 그 몰골은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만족스럽다. 의아할 정도였다. 갓 어른이 된 듯한 새파랗게 어린 계집아이가 단단한 갑주를 입고 전장을 누비는 그 모습이 어찌나 아이러니 한지. 같잖다. 그건 너무도 한심한 일이었다. 제 앞가림 할 주제도 되지 않는 것이.

"너의 그 훌륭한 조국은 이미 너를 버린 모양이구나."

그렇기에 박살내고 싶었다. 소녀가 입술을 짓씹는다. 뻔한 도발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그 모습은 패잔병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풋내 나는 애송이."

죽이기에도 모자라. 그럴 듯한 반항도 해보이지 않고 그저 무력하게 빛이나 날려대는 모습이 도대체 어딜 봐서 군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겁에 질려 벌벌 떨며 도망가기에 바쁜 사슴 새끼잖아. 이런 걸 군인이라고. 데마시아의 그 무지한 정의 족속들은 역시 쓰레기와 다를 바 없다. 

"...닥쳐."

과연. 마른 입술을 핥아내며, 카타리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내내 칼에 베이고 얻어맞더니만 제일 처음으로 한다는 말이, '닥쳐'다. 거친 호흡에 의해 떨려나온 짧은 마디였지만 목소리를 감상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강직하고 직선적인 그 바보같은 성정이 그대로 내다보이는 단정한 목소리였다. 신음 한마디 흘리지 않더니만 굳이 이제 와서 목소리를 들려주는 이유가 뭘까. 유언? 아무래도 좋다. 흥이 돋았다. 손에 든 단도를 던졌다 받으면서, 카타리나는 천천히 마른입술을 핥았다. 

"좋아. 내기를 하자, 애송아."

"...누구 마음대로...!" 

"1분을 줄 테니, 갈 수 있는 만큼 가봐." 

눈썹을 찌푸린다. 고심하는 듯한 눈빛이 약하게 흔들린다. 아무래도 좋다. 정말로 내기에 응해서 도망쳐도 재밌겠고, 이 자리에서 덤벼와도 나쁠 건 없을 것이다. 뭐가 어찌 됐든 결론은 저 얄상한 목에 시퍼런 칼날이 박히는 걸로 끝날 것이니. 무력하게 주저앉아 있는 새끼 동물보다야 실낱 같은 희망에 몸부림 치는 자를 죽이는 것이 더 즐거운 일이긴 하다만.

"...으읏...!"

소녀는 고민하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카타리나를 등진 채 바로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흙 위를 짓밟고 뛰쳐나가는 그 몸짓. 맥동하는 사슴의 혈관. 하얗게 질린 얼굴을 수놓는 땀과 핏방울을 사방에 떨쳐내며 도망하는 꼴이란! 지팡이를 꽉 쥔 손아귀와 무거운 군장을 인 그 얄상하고 가느다란 등과 허리엔 지금 당장이라도 단도를 꽂아넣을 수 있었다. 한 번 손을 쓰는 것만으로 저 무방비한 등을 찍어누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나비처럼 비틀거리다 무력하게 쓰러지겠지. 흐음. 작게 코웃음을 치며, 카타리나는 제 손으로 천천히 칼날을 훑었다. 그녀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이 기괴한 형태의 단도는 찌르고 벨 때의 그 맛이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린 살을 매끄럽게 헤치고 들어가 그 섬세한 근육과 뼈를 짓이기며 뽑아내는 칼. 이 단도로 행하는 그 살인의 쾌락은, 카타리나 뒤 쿠토 그녀 인생의 유일한 낙이었다. 저 데마시아의 어린 계집 역시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쾌락을 선사할 것이다.

1분. 

비스듬히 솟은 칼날을 서로 맞댄다. 손에 힘을 주어 부드럽게 훑어내리니 귀를 아리는 높은 소리가 울려왔다. 그녀는 끼기기긱 거리는 그 칼날의 불협화음을 조국 녹서스만큼 사랑했다. 사슴 사냥의 시간이다. 상처입고 지친 어린 마법사와, 고양이보다도 날렵하게 단련된 암살자의 추격전이다. 칼날을 감상하는 것도 잠시, 그녀는 순식간에 소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추격은 빨리 끝났다. 카타리나는 굵은 나뭇가지 위에 제 몸을 맡긴 채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작게 혀를 찼다. 무력해라. 무력해. 가소로울 정도다.

"기껏 시간을 줬는데. 이게 전부인가봐?"

"아..."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작게 탄식하며 소녀가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단도를 쏘아냈다. 썩어도 준치라 했나. 소녀는 가까스로 지팡이로 단도를 쳐내고, 작게 신음하며 제 손을 부여잡았다. 단도를 쳐내는 와중에 손가락을 베인 것이 분명했다. 제 바로 아래에서 이를 갈며 저를 올려다보는 그 새파란 눈동자는 방금 전까지 도주하던 패잔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도전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감상을 방해하듯이. 핑,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목전으로 빛의 구슬이 날아들었다. 보이는 건 그저 조금 눈부신 성가신 구슬 같지만 맞았을 때의 파괴력은 무시무시하다. 이를 잘 알기에 카타리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나뭇가지를 발판 삼아 앞으로 도약한다. 몇 번의 가벼운 공중제비를 끝으로 날렵하게 착지하면서, 견제의 목적으로 두 개의 단도를 날려보냈다.

"아윽!"

막을 수단이 없었던 모양이지? 한 개는 그 알량한 마법으로 어떻게 막아낸 모양이지만 다른 하나마저 막을 재량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소녀는 칼날이 틀어박힌 제 왼팔을 고통 서린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 놀이는 이제부턴데." 

벌써부터 떨면, 어쩌려고 그래. 혀로 입술을 축이며, 카타리나는 깔깔 대며 웃었다. 조국의 명예를 위해 두 눈을 부릅 뜨고 전장에 선 어린 마법사는 어디 갔는지. 그저 순한 양 한마리만이 제 앞에 남아 덜덜 떨고 있었다. 가볍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는 뒷걸음질 치지도 못하고 얼어있는 소녀의 앞에 우뚝 서서야 그 고통으로 잔뜩 찌푸려진 예쁜 푸른눈을 볼 수 있었다. 눈물이 어린 눈으로 카타리나를 무력하게 쳐다보면서. 소녀는 입술을 떨었다. 소녀의 어여쁜 금발이 땀과 흙먼지, 제 것이 아닌 다른 이의 피로 얼룩져 눈 앞을 흩날리고 있었다. 

카타리나는 새 단도를 꺼내들고 시위하듯 소녀의 눈 앞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천천히 이루어진 움직임이었으나 그 몸짓엔 어떠한 힘이 있었다. 저항하며 눈을 돌릴 수도, 등 돌려 도망치지도 못하게 하는 강력한 압박이었다. 소녀의 갑주 사이 빈 틈. 그 하얀 목과 여린 어깨의 살결을 따라 음미하듯이 칼날을 부드럽게 움직인다. 차디찬 칼날이 생살에 닿았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생명의 위협 때문인지. 소녀가 움찔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워낙 날카롭게 다듬어진 칼날이라 그 작은 움직임에도 살결이 베였다. 날을 타고 새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단도에 새겨진 문양을 수놓는 그 적은 피를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카타리나는 심장이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 순간이다. 이 순간에 그녀는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제 손아귀 위에 타인의 생명이 놓이는 이 마지막의 순간. 누구보다도 가까이 생과 사의 경계에 서 생명의 죽음을 고하는 이 순간에 그녀는 삶을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죽이기엔 아쉬운 감이 있지. 카타리나는 파들파들 떨리는 그 여린 몸을 제 빈 손으로 가볍게 밀어제꼈다. 상상 이상으로 가벼웠다. 떠밀려 주저앉은 소녀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으로 카타리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공포와 고통, 분노, 슬픔, 알 수 없는 어떤 감정과 그리고 의문이 뒤섞인 눈빛이 카타리나의 모습을 담고있었다. 

가장 먼저. 그녀는 소녀의 심장 부근에 단도를 내뻗었다. 그대로 찌를 듯이 칼날을 치켜 올린다. 소녀의 눈을 마주보면서 카타리나는 이 일련의 행위를 즐기고 있었다. 소녀가 죽음을 각오한 듯한 눈을 하자마자, 목표를 옮겨 갑주의 연결부위를 베어내렸다. 쨍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소녀의 상반신을 감싸고 있던 갑옷의 일부가 바닥으로 떨어져내린다. 갑주 아래에 입는 몸에 딱 달라붙는 재질의 가죽옷만이 소녀를 감싼 채 온전히 남아있었다. 

명백히. 희롱하는 행위였다. 

"카타리나 뒤 쿠토...!" 

소녀가 분노에 차 그 이름을 부르짖자, 카타리나는 뒤이어 소녀의 남은 옷마저 칼날로 베어냈다. 탐스러운 살결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쇄골과 소녀답게 아름다운 형태의 가슴, 새하얀 살결을 자랑하듯 호흡에 따라 오르내리는 예쁜 배와 허리. 앙증맞게 패인 배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갑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몸매가 순식간에 카타리나의 눈 앞에 보여지고 있었다. 소녀가 성한 손을 들어올렸다. 제 상체를 가리겠다는 그 심정이 보여서,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이 카타리나가 팔을 잡아챘다. 여린 팔목을 짓누르듯 찍어눌러 제압하고. 엉거주춤 앉아있던 소녀를 떠밀어 눕힌다. 바닥에 눕혀진 소녀는 거의 공포에 질려 허우적대며 몸을 움츠리려 했다. 

가소롭기는. 카타리나가 소녀의 왼팔에 박혀있던 단도를 아무렇지 않게 뽑아올리자,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치떴다. 째지는 목소리와 피가 허공을 수놓으며 자욱이 퍼진다. 봐주지 않겠다는 듯이, 카타리나는 가볍게 웃으며 소녀의 하얀 배를 맨 손으로 쓰다듬었다. 언제든지 이 곳을 찔러버릴 수 있었다. 무언의 행위에 소녀가 몸을 파들파들 떨며 카타리나를 올려다본다. 공포와 고통, 분노, 몇몇의 감정과 의문으로 뒤섞여 있던 그 어여쁜 푸른눈은 이제 사랑스러울 정도로 여리게 떨리고 있었다.

카타리나는 욕망에 이끌리듯 그 눈에 입맞추고, 소녀의 입술을 매끄럽게 핥아올렸다. 입술을 열지 않으려 하는 자그마한 반항에 분노해 명치 즈음을 세게 내리치자 그제야 가쁜숨을 내쉬며 소녀가 입을 벌렸다. 그 여린 입술을 탐한다. 주저하지 않고 가지런한 치아와 입천장, 피맛이 나는 입술을 핥고 빨아올리며 들썩이는 몸을 재차 짓눌렀다. 그 깊은 곳 안에 엉거주춤 굳어있는 혀를 제 것으로 자극하는 순간, 소녀가 이를 악 물었다. 

"윽."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거절을 한다고. 얼얼한 혀와 피맛이 나는 침을 삼키며, 카타리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이었다. 이런 식의 반항은. 소녀는 경멸한다는 듯한 눈으로 카타리나를 올려다보며 제 입술을 마구 짓씹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이 가만히 두고볼 수가 없다. 

"이 가소로운 애송이가 감히."

우악스럽게 가슴을 쥐어잡았다. 같은 여자로서 그녀는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여자가 고통스러워 하는지 잘 알고있었다. 가슴을 거칠게 쥐어잡고, 쥐어짜듯이 손아귀에 힘을 가했다. 비틀어 꺾으며 손톱으로 그 여린 살을 짓눌렀다. 강한 손아귀 힘으로 압박하자 소녀가 발버둥을 치며 카타리나를 밀어내려 애쓰기 시작했다. 아무렴, 저항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눈은 소녀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카타리나는 그 반응을 즐기듯 가슴을 쥐었다 풀어줬다 했다. 와중에 유두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자극하기도 했다. 

하지만 목적이 섹스가 아니므로, 굳이 정성들여 애무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소녀의 모든 것에 대한 정복이었다. 그 생명과 목숨 뿐만 아니라 신체의 모든 자유, 가령 예를 들자면 순결이라든지 혹은 성감 같은 소녀가 이전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신체의 모든 권리 말이다. 그녀는 단도로 옷을 더욱 도려내기 시작했다. 고작 옷이나 잘라내라고 있는 칼은 아니지만 이 역시 하나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생명 뿐 아니라 그 외의 모든 신체적 가치를 희롱하고 조롱하는 행위 자체에 정복감과 만족감을 느끼면서. 카타리나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복부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니, 그제서야 소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카타리나가 어떤 목적으로 일을 벌이고 있는지 드디어 확신을 마친 모양이었다. 경멸로 일렁이던 그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소녀의 질 입구를 무심하게 쓰다듬으면서, 나머지 손가락을 이용해 아래를 훔쳤다. 특별한 애무를 한 건 아니어서 만족할 만큼 젖어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애액은 거의 나오지 않아 이대로 삽입한다면 꽤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알 바는 아니었다. 제 손가락을 질 안으로 쓰윽 들이밀면서, 카타리나는 소녀의 얼굴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차츰차츰 더욱 깊이 들어갈수록 소녀의 얼굴 역시 아름답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전에 이렇게 성적으로 타인을 희롱한 적은 없었지만 이 설명하지 못할 묘한 정복감과 카타르시스에 그녀는 가슴이 떨림을 느꼈다. 

"럭산나 크라운가드. 녹서스인에 의해 지배당하는 기분은 어때?" 

"...흐, 으... 으읏"

"...흥미로워." 

이런 상대는 없었다. 죽이는 것보다도 자신이 갖고싶어지는 상대는. 그런 욕심에 이끌려서, 그녀는 제 손의 움직임에 좀 더 힘을 가했다. 고통으로 덜덜 떨리던 몸이 손가락의 가벼운 두드림 한 번에 움찔움찔 아우성 치는 것이 가소롭지만 또한 그만큼 사랑스러웠다. 카타리나 뒤 쿠토가, 타인에게 '사랑스럽다'라는 감정을 느낀다고. 눈을 깜빡이면서 카타리나는 작게 실소했다. 한 팔이 열심히 치대며 움직이는 만큼. 그녀는 다른 손으로 럭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흠뻑 젖은 땀을 훔쳐내고 눈물을 닦아내며 찢어지고 튼 입술을 상냥하게 어루만져줬다. 상냥하게라. 내심 놀라면서도 카타리나는 제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럭스를 가지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기뻤다.

풋내나는 애송이 럭산나 크라운가드가 카타리나 뒤 쿠토의 마음을 떨리게 했다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 인정하는 자신이 있었다. 앞으로 어찌 해야 할까. 적대국의 귀족으로서 둘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존재였다. 원래라면 여기 이 자리에서, 럭스는 죽어야했다. 하지만 이제 카타리나는 럭스를 죽일 수 없었다. 이리도 아름다운 물건을 어찌 해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제 마음을 부인하면서, 결국 카타리나는 오른팔을 움직이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둘의 이 첫만남과 첫섹스가 럭스와 카타리나 자신의 관계를 잇는 신호탄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15.05.31


수위라기엔 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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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망베르 베베
Backup - etc2018. 9. 17. 02:59

큰일났다. 무너지는 건물을 피해 도망나오면서, 메두사는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느닷없는 붕괴 조짐에 설마설마 하는 생각은 들었다만. 언제나 설마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법이었다. 유일한 입구를 통해 달려나온 메두사는 곧 제 등 뒤로 들려오는 끔찍하고 우직한 우레소리와 온몸을 떨게 만드는 큰 진동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 온전한 건물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믿지 못할만큼 처참한 모습으로, 폭삭 내려앉은 돌더미들은 저들끼리 우수수 쏟아져내리며 메두사의 뒤통수를 두드리고 있었다.


"질긴 것들. 아예 건물에 묻혀 뒈져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혼비백산해 도망나온 메두사들을 맞은 건 나이프의 영원한 적수인 스푼의 히어로들이었다. 제 앞을 딱 막고 선 히어로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사나운 눈으로 당장에라도 달려들듯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낭패다. 명백한 핀치다. 하나같이 얕볼 수 없는 쟁쟁한 히어로들. 단단히 각오하고 나왔네. 내심 혀를 차면서도 메두사는 히어로들 가운데서 유독 빛나는 얼굴, 다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다나! 역시 너였구나! 친절한 환영 고마워~"


안 그래도 무서운 눈이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이 사납게 일그러진다. 즉각적인 반응에 만족하는 찰나, 다나가 이를 갈며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의식적으로 화를 가라앉히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다만 눈빛은 전혀 가라앉지 않고 번뜩이는 것이 의도대로 잘 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다나가 눈치채지 못하게 양 쪽의 전력을 비교해봤지만 역시나 승산은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모양인지 모르겠지만 자신들이 이 곳에 올 것을 깨닫고 진작부터 포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메두사가 기회를 노리며 눈을 돌리는 것을 알았는지, 히어로들 중 한명이 흘깃 눈치를 보며 다나를 부른다. 


"서장님?"


"됐어. 저 놈들 잡아라."


오래 가지는 않네. 메두사가 작게 혀를 차는동안, 오르카가 얼른 그녀 앞으로 서 싸울 태세를 취했다. 안 좋다. 히어로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둘을 둥글게 포위하며 비웃음을 지었다. 오르카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다나 앞에서는 쪽도 쓰지 못할 것이 뻔한데다 숫적으로도 우월한 상황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이 양반들은 여즉 뭘 하기에 이리 굼떠? 이 곳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뒷통수를 세게 후려줄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메두사 역시 싸울 태세를 갖췄다. 솔직히 기다려준 게 용한 일이었다. 


히어로들은 사방에서 동시에 덮쳐들어 오면서 그들의 특기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반절 이상이 오르카에게 향하는 것을 곁눈질로 흝어보고 제게 가해지는 총격을 피해 재빠르게 몸을 뒤로 굴렸지만 건물이 무너져내려 뻥 뚫린 공터엔 몸을 엄폐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느릿느릿한 섬유를 조종해서 총알을 막아낼 수도 없는 법이고. 게다가 근접 전투나 육박전 특화의 히어로들은 오르카를 상대하러 갔는지 메두사에게 온 히어로들은 하나같이 원거리 공격형이었다. 그러니까, 다들 멀리서 총탄을 마구 쏴댔다는 말이다. 한명만 가까이 와도 섬유를 이용해 잡아채 인간 방패를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요원한 일이 되었다. 하는 수 없다. 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메두사는 아직까지 크고작은 돌더미들이 쏟아져 내리는 허물어진 건물 사이로 제 몸을 던졌다. 허물어진 콘크리트 덩어리 위를 구르며 엉망진창인 몰골이 되었지만 몸에 구멍이 나는 것보단 나을 것이었다. 


"이러지 말고 대화로 풀어보는 게 어떨까?!"


아무렇게나 말을 내던지면서 메두사 역시 비상용으로 준비한 권총을 꺼내들었다. 상대가 다나라면 총으로는 흠집도 낼 수 없겠지만 히어로들을 상대로는 충분한 무기였다. 숨은 콘크리트 덩어리 위를 두드리는 총격에 고개를 내밀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총만 내밀어 견제사격을 가한다. 탕탕 거리는 총성만이 공터를 휘몰아치며 잠시동안 소강상태를 만드는 듯 했다. 확실한 일격을 꽂아넣으려면 필수적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콘크리트 파편 틈에 숨어있는 그녀를 공격해야한다. 누가 됐든 제일 먼저 다가오는 녀석은 벌집으로 만들어주리라 마음 먹으면서, 메두사는 온 신경을 집중해 권총을 꽉 쥐었다. 반푼이 같은 스푼이 건물까지 날려먹으며 실행한 작전이다. 무슨 수가 있어도 그녀를 잡으려 할 것이다. 건물이 통으로 우르르 무너져내렸으니 그 바보들이 뭐가 잘못 되었다는 걸 알고 빨리 도와주러 와주는 것 밖엔 답이 없었다. 그때까지 오르카가 버텨줄 수 있을까. 차마 고개를 내밀수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엉거주춤 앉아있는 사이였다. 


쾅, 하는. 예측불가능 할 정도로 파괴적인. 어이없을 정도로 커다란 포성과도 같은 소리가 귀청을 찢어버릴 듯이 울려퍼졌다. 귀가 멍멍하니 얼어붙어있는데 제 옆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돌벽들이 기초 철근이 뚝 부러진 채로 폭발하듯이 비산하며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개중에 작은 콘크리트 조각 몇 개가 메두사의 몸 위로도 후드득 튀어올랐다. 


"미친 무식한……"


더 이상 말도 나오지 않았다. 투시 능력자가 위치를 가르쳐주기라도 한 건지, 메두사의 바로 옆만을 휑 뚫어버린 사람. 다나가 제 손을 휘휘 털어 돌가루를 흩뿌리며 붉은 눈동자를 형형히 빛내고 있었다. 앉아있는 메두사를 천천히 내려다보는 그 눈엔 살의가 물씬 담겨 가히 오금이 저릴 정도로 날카로웠다. 


"…명색이 히어로인데 이렇게 건물을 날려먹어도 되는 거야?"


"어차피 철거예정이었다."


메두사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다나가 손으로 휑한 콘크리트 더미를 가리켰다. 겉은 차분해보이지만 속이 얼마나 들끓고있는지 목소리 톤이 잔뜩 낮아진데에다 레이저를 쏘는 특기를 가지기라도 한 듯, 희뿌연 흙먼지들 사이에서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두 말 할 나위 없이 무서웠다. 하지만 어쩐지 그 눈빛에, 그 정직할 정도로 단순한 일념과 맹목적인 분노와 살의가 오롯이 저만을 향한다는 데에서 희열을 느끼면서, 메두사는 씨익 미소지었다.


"역시 최고야 다나는."


"닥치고 죽어."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이. 다나가 손을 내뻗어왔다. 반항하지 않는 메두사의 목울대를 한 손에 움켜쥐고 천천히 힘을 주고 조여온다. 한순간에 목을 부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는 지금부터 널 죽일 거야, 라고 선고하는 듯이 점점 늘어가는 그 아귀힘엔 감동마저 느낄 정도였다. 다만, 상대가 다나라 해도 메두사는 이대로 죽고싶지는 않았다. 슬슬 목근육이 조여지고 숨이 막혀오는 즈음 해서 결국 메두사는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떨궜다.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할 법도 하지만 다나는 이미 메두사를 죽이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인 듯 했다.


그렇기에 살아날 수 있는 거다. 위에서부터 내리누르는 다나의 단단한 팔에 제 목을 맡긴 채, 메두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뱀이 나와봤자 붙잡아버리면 그만이라는 듯한 다나의 생각을 전부 읽을 수 있었다. 아, 이렇게나 다나를 잘 아는 건 나 밖에 없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잘 생긴 사람이랑 죽고 죽일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되었는지 아쉬워 하면서. 메두사는 괴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 랑해……, 다나."


그것은 분명 다나가 예측하지 못한 말이었을 것이다.


"개소리."


다나는 차갑게 내치듯 말하면서도 아귀힘이 살짝 줄어들었다는 것은 모르는 듯 했다. 슬슬 산소가 부족하다. 마음이 급해졌지만 메두사는 일을 재촉하지 않았다. 처연하게 미소지으면서 다시 한 번,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사랑해. 메두사는 살의로 가득차 분노로 번뜩이던 다나의 눈이, 화내지 않기 위해 부여잡고있던 한 줌의 이성으로 순식간에 물드는 것을 보았다. 다나는 분명 다시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여기서 메두사를 죽이느냐 살아서 잡아가느냐를 두고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으로 인해 눈물이 새어나왔다. 제대로 생각하고 있을 정신은 없었지만 메두사는 그 눈물을 이용하기로 했다. 힘없이 웃으면서 그저 제가 가진 모든 감정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사랑해 다나. 맛이 간데다 힘이 없어 맥없어 속삭이는 말이었지만 그게 어떤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했다. 다나가 천천히 제 손을 놓았다. 


"…백모래가 뭘 시킨 거냐."


콜록콜록 잔기침을 뱉으면서 메두사는 간신히 다나를 올려다보았다. 뭘 하려 했느냐고? 마음이 흔들려서 놔줘놓고는 이걸 물어보기 위해서 살려줬다는 듯 뻔뻔하게 나오는 태도가 귀엽기 그지 없었다. 이쯤되면 올 법도 하지 않느냐고. 애타는 마음을 간절히 숨긴 채 대답을 회피하고 기침만 내뱉고 있자니, 돌연 다나가 메두사의 턱을 잡아 올렸다. 강제로 고개를 들어올리게 해 눈을 마주치게 하는 탓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 했다. 무방비한 상태로 저 잘생긴 얼굴을 눈 앞에서 보게 되다니. 


"빨리 바른대로 말해."


"…말하면, 살려줄 거야?"


의도치 않게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눈물을 매단 채 떨려나오는 제 목소리가 자신이 듣기에도 처량하다 싶었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놀라있는 참에 다나가 메두사를 손에서 놓으며 눈을 찌푸렸다. 


"다시 한 번 목을 졸라줄까?"


"아니, 그건 거절하고 싶은데."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메두사는 갈등하면서 눈을 감았다. 여기서 이실직고 하고 고분고분 구는 것이 좀 더 오래 명을 연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주알고주알 정보를 불어댄 걸 들켰다간 백모래에게 어떤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살고 봐야 하지 않겠어. 결국 결심하고 눈을 뜨자마자 돌연 사방에서 홧홧한 기운이 덮쳐왔다. 자욱한 흙먼지를 불살라버리며 타오른 것은 새빨간 화염이었다. 메두사의 주위를 빙 두른 것으로 모자라 콘크리트 더미와 공터 사방에서 동시에 불타오르는 불꽃에 사방에서 비명소리와 탄식이 들려온다. 


"참 빨리도 오시네요!"


메두사가 잔뜩 맛이 간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자, 불 사이를 가로지르며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새까만 정장에 어딘가 촌스러운 색조의 꽃무늬 셔츠를 갖춰입은 다나와는 반대로, 온통 새하얀 정장을 입은 채 눈에 붕대를 두른 곱상한 남자와 녹색의 긴 머리칼을 휘날리는 피부가 새까맣게 탄 검사. 백모래와 송화였다. 송화가 일으킨 불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았던 탓에 다나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 배신자놈." 


기껏 가라앉힌 분노가 다시 차올랐는지 다나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진다. 다나가 한 눈을 파는 틈을 타 메두사는 서둘러 그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는 길에 챙긴 모양인지 송화에 어깨엔 거의 피범벅이 된 오르카가 힘없이 축 늘어져있었다. 황급히 다가온 메두사의 위아래를 천천히 훑어보던 백모래가 불바다 사이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태평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몰골이 엉망이 됐네?"


"이게 다 늦게오셔서 그런 거잖아요!"


어찌되었든 나이프가 무사히 전부 집합했다. 메두사는 그제서야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찾아오라던 건?"


"없어요. 그 전에 건물이 무너졌는 걸요." 


"그래? 아쉽게 됐네."


전혀 아쉽지 않다는 투로 툭 내뱉으면서, 백모래가 휘 고개를 돌려 다나 쪽을 쳐다보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얻은 게 없으니 혼나겠네. 다나 경질 당하는 거 아니야?"


"그럼 저희야 좋고요."


메두사도 뒤이어 다나를 돌아보았다. 백모래와 메두사 둘 다 놓치게 생긴 것에 낭패한 기색이 만연했다. 나이프 일원들을 한 차례씩 흝어보고 째려보는 그 성난 눈을 마주보면서 메두사는 베시시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을 흔들며 휙 등을 돌리자, 뒤에서 정체 모를 악소리가 울려왔다. 단단히 화난 모양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화나면 특기가 사라져서 크게 데일지도 모를 텐데. 남 걱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워진 제 상황에 웃음을 흘리며 메두사는 공터를 벗어났다. 










"그나저나 어떻게 살아남으신 겁니까?"


자꾸만 흘러내리려 하는 오르카를 아예 등에 업은 송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다나와 단 둘이서 일대일 상황을 맞아 살아돌아온 게 적잖이 놀랍다는 말투였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사랑한다고 하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겠어?"


"…아, 예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제 우문을 마무리 하면서, 송화가 눈을 깜빡였다. 그가 알던 다나라면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어떤 말을 듣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상황을 제 눈으로 지켜본 것이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정말 마음이 혹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간 들었지만 결국 생판 남인 그가 다나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모래가 랩터를 사랑해 미친짓을 벌였듯이, 사랑이란 건 결국 어떻게든 사람을 망쳐놓질 않던가. 그 역시 그 감정에 자유롭지 않았고 저 미친개 서장도 사람인 이상 사랑에 흔들릴 수도 있는 법이었다.

그는 잔뜩 헝클어지고 엉망이 된 메두사를 무심히 내려다보면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혹시 어쩌면 모를 일이었다. 




-15.08.18

본편 전으로 생각하고 썼어요. 나이프가 잠수타기 전이 2년 전인가 그러니까 딱 그 정도?

Posted by 까망베르 베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