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났다. 무너지는 건물을 피해 도망나오면서, 메두사는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느닷없는 붕괴 조짐에 설마설마 하는 생각은 들었다만. 언제나 설마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법이었다. 유일한 입구를 통해 달려나온 메두사는 곧 제 등 뒤로 들려오는 끔찍하고 우직한 우레소리와 온몸을 떨게 만드는 큰 진동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 온전한 건물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믿지 못할만큼 처참한 모습으로, 폭삭 내려앉은 돌더미들은 저들끼리 우수수 쏟아져내리며 메두사의 뒤통수를 두드리고 있었다.
"질긴 것들. 아예 건물에 묻혀 뒈져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혼비백산해 도망나온 메두사들을 맞은 건 나이프의 영원한 적수인 스푼의 히어로들이었다. 제 앞을 딱 막고 선 히어로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사나운 눈으로 당장에라도 달려들듯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낭패다. 명백한 핀치다. 하나같이 얕볼 수 없는 쟁쟁한 히어로들. 단단히 각오하고 나왔네. 내심 혀를 차면서도 메두사는 히어로들 가운데서 유독 빛나는 얼굴, 다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다나! 역시 너였구나! 친절한 환영 고마워~"
안 그래도 무서운 눈이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이 사납게 일그러진다. 즉각적인 반응에 만족하는 찰나, 다나가 이를 갈며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의식적으로 화를 가라앉히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다만 눈빛은 전혀 가라앉지 않고 번뜩이는 것이 의도대로 잘 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다나가 눈치채지 못하게 양 쪽의 전력을 비교해봤지만 역시나 승산은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모양인지 모르겠지만 자신들이 이 곳에 올 것을 깨닫고 진작부터 포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메두사가 기회를 노리며 눈을 돌리는 것을 알았는지, 히어로들 중 한명이 흘깃 눈치를 보며 다나를 부른다.
"서장님?"
"됐어. 저 놈들 잡아라."
오래 가지는 않네. 메두사가 작게 혀를 차는동안, 오르카가 얼른 그녀 앞으로 서 싸울 태세를 취했다. 안 좋다. 히어로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둘을 둥글게 포위하며 비웃음을 지었다. 오르카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다나 앞에서는 쪽도 쓰지 못할 것이 뻔한데다 숫적으로도 우월한 상황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이 양반들은 여즉 뭘 하기에 이리 굼떠? 이 곳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뒷통수를 세게 후려줄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메두사 역시 싸울 태세를 갖췄다. 솔직히 기다려준 게 용한 일이었다.
히어로들은 사방에서 동시에 덮쳐들어 오면서 그들의 특기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반절 이상이 오르카에게 향하는 것을 곁눈질로 흝어보고 제게 가해지는 총격을 피해 재빠르게 몸을 뒤로 굴렸지만 건물이 무너져내려 뻥 뚫린 공터엔 몸을 엄폐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느릿느릿한 섬유를 조종해서 총알을 막아낼 수도 없는 법이고. 게다가 근접 전투나 육박전 특화의 히어로들은 오르카를 상대하러 갔는지 메두사에게 온 히어로들은 하나같이 원거리 공격형이었다. 그러니까, 다들 멀리서 총탄을 마구 쏴댔다는 말이다. 한명만 가까이 와도 섬유를 이용해 잡아채 인간 방패를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요원한 일이 되었다. 하는 수 없다. 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메두사는 아직까지 크고작은 돌더미들이 쏟아져 내리는 허물어진 건물 사이로 제 몸을 던졌다. 허물어진 콘크리트 덩어리 위를 구르며 엉망진창인 몰골이 되었지만 몸에 구멍이 나는 것보단 나을 것이었다.
"이러지 말고 대화로 풀어보는 게 어떨까?!"
아무렇게나 말을 내던지면서 메두사 역시 비상용으로 준비한 권총을 꺼내들었다. 상대가 다나라면 총으로는 흠집도 낼 수 없겠지만 히어로들을 상대로는 충분한 무기였다. 숨은 콘크리트 덩어리 위를 두드리는 총격에 고개를 내밀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총만 내밀어 견제사격을 가한다. 탕탕 거리는 총성만이 공터를 휘몰아치며 잠시동안 소강상태를 만드는 듯 했다. 확실한 일격을 꽂아넣으려면 필수적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콘크리트 파편 틈에 숨어있는 그녀를 공격해야한다. 누가 됐든 제일 먼저 다가오는 녀석은 벌집으로 만들어주리라 마음 먹으면서, 메두사는 온 신경을 집중해 권총을 꽉 쥐었다. 반푼이 같은 스푼이 건물까지 날려먹으며 실행한 작전이다. 무슨 수가 있어도 그녀를 잡으려 할 것이다. 건물이 통으로 우르르 무너져내렸으니 그 바보들이 뭐가 잘못 되었다는 걸 알고 빨리 도와주러 와주는 것 밖엔 답이 없었다. 그때까지 오르카가 버텨줄 수 있을까. 차마 고개를 내밀수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엉거주춤 앉아있는 사이였다.
쾅, 하는. 예측불가능 할 정도로 파괴적인. 어이없을 정도로 커다란 포성과도 같은 소리가 귀청을 찢어버릴 듯이 울려퍼졌다. 귀가 멍멍하니 얼어붙어있는데 제 옆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돌벽들이 기초 철근이 뚝 부러진 채로 폭발하듯이 비산하며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개중에 작은 콘크리트 조각 몇 개가 메두사의 몸 위로도 후드득 튀어올랐다.
"미친 무식한……"
더 이상 말도 나오지 않았다. 투시 능력자가 위치를 가르쳐주기라도 한 건지, 메두사의 바로 옆만을 휑 뚫어버린 사람. 다나가 제 손을 휘휘 털어 돌가루를 흩뿌리며 붉은 눈동자를 형형히 빛내고 있었다. 앉아있는 메두사를 천천히 내려다보는 그 눈엔 살의가 물씬 담겨 가히 오금이 저릴 정도로 날카로웠다.
"…명색이 히어로인데 이렇게 건물을 날려먹어도 되는 거야?"
"어차피 철거예정이었다."
메두사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다나가 손으로 휑한 콘크리트 더미를 가리켰다. 겉은 차분해보이지만 속이 얼마나 들끓고있는지 목소리 톤이 잔뜩 낮아진데에다 레이저를 쏘는 특기를 가지기라도 한 듯, 희뿌연 흙먼지들 사이에서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두 말 할 나위 없이 무서웠다. 하지만 어쩐지 그 눈빛에, 그 정직할 정도로 단순한 일념과 맹목적인 분노와 살의가 오롯이 저만을 향한다는 데에서 희열을 느끼면서, 메두사는 씨익 미소지었다.
"역시 최고야 다나는."
"닥치고 죽어."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이. 다나가 손을 내뻗어왔다. 반항하지 않는 메두사의 목울대를 한 손에 움켜쥐고 천천히 힘을 주고 조여온다. 한순간에 목을 부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는 지금부터 널 죽일 거야, 라고 선고하는 듯이 점점 늘어가는 그 아귀힘엔 감동마저 느낄 정도였다. 다만, 상대가 다나라 해도 메두사는 이대로 죽고싶지는 않았다. 슬슬 목근육이 조여지고 숨이 막혀오는 즈음 해서 결국 메두사는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떨궜다.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할 법도 하지만 다나는 이미 메두사를 죽이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인 듯 했다.
그렇기에 살아날 수 있는 거다. 위에서부터 내리누르는 다나의 단단한 팔에 제 목을 맡긴 채, 메두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뱀이 나와봤자 붙잡아버리면 그만이라는 듯한 다나의 생각을 전부 읽을 수 있었다. 아, 이렇게나 다나를 잘 아는 건 나 밖에 없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잘 생긴 사람이랑 죽고 죽일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되었는지 아쉬워 하면서. 메두사는 괴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 랑해……, 다나."
그것은 분명 다나가 예측하지 못한 말이었을 것이다.
"개소리."
다나는 차갑게 내치듯 말하면서도 아귀힘이 살짝 줄어들었다는 것은 모르는 듯 했다. 슬슬 산소가 부족하다. 마음이 급해졌지만 메두사는 일을 재촉하지 않았다. 처연하게 미소지으면서 다시 한 번,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사랑해. 메두사는 살의로 가득차 분노로 번뜩이던 다나의 눈이, 화내지 않기 위해 부여잡고있던 한 줌의 이성으로 순식간에 물드는 것을 보았다. 다나는 분명 다시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여기서 메두사를 죽이느냐 살아서 잡아가느냐를 두고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으로 인해 눈물이 새어나왔다. 제대로 생각하고 있을 정신은 없었지만 메두사는 그 눈물을 이용하기로 했다. 힘없이 웃으면서 그저 제가 가진 모든 감정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사랑해 다나. 맛이 간데다 힘이 없어 맥없어 속삭이는 말이었지만 그게 어떤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했다. 다나가 천천히 제 손을 놓았다.
"…백모래가 뭘 시킨 거냐."
콜록콜록 잔기침을 뱉으면서 메두사는 간신히 다나를 올려다보았다. 뭘 하려 했느냐고? 마음이 흔들려서 놔줘놓고는 이걸 물어보기 위해서 살려줬다는 듯 뻔뻔하게 나오는 태도가 귀엽기 그지 없었다. 이쯤되면 올 법도 하지 않느냐고. 애타는 마음을 간절히 숨긴 채 대답을 회피하고 기침만 내뱉고 있자니, 돌연 다나가 메두사의 턱을 잡아 올렸다. 강제로 고개를 들어올리게 해 눈을 마주치게 하는 탓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 했다. 무방비한 상태로 저 잘생긴 얼굴을 눈 앞에서 보게 되다니.
"빨리 바른대로 말해."
"…말하면, 살려줄 거야?"
의도치 않게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눈물을 매단 채 떨려나오는 제 목소리가 자신이 듣기에도 처량하다 싶었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놀라있는 참에 다나가 메두사를 손에서 놓으며 눈을 찌푸렸다.
"다시 한 번 목을 졸라줄까?"
"아니, 그건 거절하고 싶은데."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메두사는 갈등하면서 눈을 감았다. 여기서 이실직고 하고 고분고분 구는 것이 좀 더 오래 명을 연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주알고주알 정보를 불어댄 걸 들켰다간 백모래에게 어떤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살고 봐야 하지 않겠어. 결국 결심하고 눈을 뜨자마자 돌연 사방에서 홧홧한 기운이 덮쳐왔다. 자욱한 흙먼지를 불살라버리며 타오른 것은 새빨간 화염이었다. 메두사의 주위를 빙 두른 것으로 모자라 콘크리트 더미와 공터 사방에서 동시에 불타오르는 불꽃에 사방에서 비명소리와 탄식이 들려온다.
"참 빨리도 오시네요!"
메두사가 잔뜩 맛이 간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자, 불 사이를 가로지르며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새까만 정장에 어딘가 촌스러운 색조의 꽃무늬 셔츠를 갖춰입은 다나와는 반대로, 온통 새하얀 정장을 입은 채 눈에 붕대를 두른 곱상한 남자와 녹색의 긴 머리칼을 휘날리는 피부가 새까맣게 탄 검사. 백모래와 송화였다. 송화가 일으킨 불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았던 탓에 다나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 배신자놈."
기껏 가라앉힌 분노가 다시 차올랐는지 다나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진다. 다나가 한 눈을 파는 틈을 타 메두사는 서둘러 그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는 길에 챙긴 모양인지 송화에 어깨엔 거의 피범벅이 된 오르카가 힘없이 축 늘어져있었다. 황급히 다가온 메두사의 위아래를 천천히 훑어보던 백모래가 불바다 사이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태평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몰골이 엉망이 됐네?"
"이게 다 늦게오셔서 그런 거잖아요!"
어찌되었든 나이프가 무사히 전부 집합했다. 메두사는 그제서야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찾아오라던 건?"
"없어요. 그 전에 건물이 무너졌는 걸요."
"그래? 아쉽게 됐네."
전혀 아쉽지 않다는 투로 툭 내뱉으면서, 백모래가 휘 고개를 돌려 다나 쪽을 쳐다보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얻은 게 없으니 혼나겠네. 다나 경질 당하는 거 아니야?"
"그럼 저희야 좋고요."
메두사도 뒤이어 다나를 돌아보았다. 백모래와 메두사 둘 다 놓치게 생긴 것에 낭패한 기색이 만연했다. 나이프 일원들을 한 차례씩 흝어보고 째려보는 그 성난 눈을 마주보면서 메두사는 베시시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을 흔들며 휙 등을 돌리자, 뒤에서 정체 모를 악소리가 울려왔다. 단단히 화난 모양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화나면 특기가 사라져서 크게 데일지도 모를 텐데. 남 걱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워진 제 상황에 웃음을 흘리며 메두사는 공터를 벗어났다.
"그나저나 어떻게 살아남으신 겁니까?"
자꾸만 흘러내리려 하는 오르카를 아예 등에 업은 송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다나와 단 둘이서 일대일 상황을 맞아 살아돌아온 게 적잖이 놀랍다는 말투였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사랑한다고 하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겠어?"
"…아, 예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제 우문을 마무리 하면서, 송화가 눈을 깜빡였다. 그가 알던 다나라면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어떤 말을 듣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상황을 제 눈으로 지켜본 것이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정말 마음이 혹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간 들었지만 결국 생판 남인 그가 다나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모래가 랩터를 사랑해 미친짓을 벌였듯이, 사랑이란 건 결국 어떻게든 사람을 망쳐놓질 않던가. 그 역시 그 감정에 자유롭지 않았고 저 미친개 서장도 사람인 이상 사랑에 흔들릴 수도 있는 법이었다.
그는 잔뜩 헝클어지고 엉망이 된 메두사를 무심히 내려다보면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혹시 어쩌면 모를 일이었다.
-15.08.18
본편 전으로 생각하고 썼어요. 나이프가 잠수타기 전이 2년 전인가 그러니까 딱 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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