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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7. 19.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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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up - etc2018. 9. 17. 03:03


마수 처치에 대해선 베테랑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마미조차도. 일정 수를 넘는 마수 무리들에게 포위되는 상황에서는 도주를 우선하고는 했다. 혼자의 몸으로 감당키 어려운 수의 마수와 싸우는 것은 사실상의 자살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아케미 호무라는 활을 들고는 했다. 그녀의 의무는 마수를 쓰러뜨리고 세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일찍이 존재했던 한 소녀, 카나메 마도카가 사랑했던 세계를 위해. 하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의 의무로부터 탈출하고 싶다는 유혹에 매 순간 활을 놓기를 소원했다. 마수와의 사투 끝에 자신의 최후를 맞는 것은 가장 이상적인 결말. 하지만, 그래서는 늦는다. 매 순간 그녀는 마도카로부터 멀어진다. 마도카의 흔적과 의지는 이제 그 어느 곳에서도 느껴지질 않았다. 그저 다른 마법소녀가 원환되는 그 마지막 순간에나, 마도카는 실존한다고 겨우 실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아케미 호무라에게 있어 최대의 비극이었다. 삶의 근원을 잃는 것과 같은 상실감. 더 이상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욕과 열의 그 무엇 하나도 없이 그저 호무라는 마수를 죽이는 기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결국은 부서져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그런 기계. 그러나 그런 모습은 호무라 자신 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상태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쿄코는 협력을 거부했다. 자살신봉자에게 등을 맡길 수는 없다고 단언한 그녀는 홀로 행동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마미와도 멀어지게 되었다. 이제와서는 카자미노 시와 미타키하라 시 양 쪽을 오가며 마수 퇴치를 반복하는 모습만이 간혹 보일 따름이었다. 어쩌다 마주치더라도, 비웃듯이 말을 걸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 자살신봉자는, 그래. 아직도 안 죽었어?'



반면 토모에 마미는. 사람을 버리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 아케미 호무라와의 동행이 이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미는 차마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꼭, 손을 놓는 순간 사라져 버릴 모래알 같은 존재였다. 몰랐다면 할 수 없지만 이제는 마미의 눈 앞에 놓인 사람이다. 그녀가 구제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아케미 호무라를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를 돕고싶어.' 



그것이 마미의 의지였다. 토모에 마미의 근간은 선업(善業)이다. 아케미 호무라의 근간이 마도카, 이제는 실전된 현상이라면 마미의 근간은 마법소녀의 행위 그 자체였다. 다른 이를 구하리라. 마미의 목적은 단순했고 따라서 호무라에게 행해지는 관심 역시 언제나 선의에 근거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마미의 도움은 호무라에게 있어선 또 다른 비극과 다를 바 없었다. 



"아케미 양?"



지칠 줄 모르는 끝없는 관심. 그것은 밀어내고 거부하고 무시해도 사라지는 일이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호무라는 마미의 모든 관심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했다.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리 했으리라. 



"...잠깐. 제대로 잠은 자고 있는 거니? 많이 피로해보여."



'아무래도 좋잖아.'라는 생각은 호무라의 안에서 맴돌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 사람은 그런 단순한 거부의 반응에 기뻐한다. 적어도 아직은 대화할 의지가 있다고 판단하고 2차적인 추궁에 들어올 것이다. 이제는 거북하다 못해 경멸이 일 정도의 그런 선의는 호무라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등을 돌린다. 그것으로 대답이 되었기를 바라며, 호무라는 마미에게서 떠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이 실책이라면 실책이었을 것이다. 토모에 마미는 생각보다 끈질긴 사람이었다. 마미는 분명 버려지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허나 어느 순간부터, 마미는 버려짐에도 불구하고 추격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게 되었다. 호무라의 영향이었다. 이제는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동료에게마저 버려지는 현실을 참지 못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마미는 이제 내쳐질 걸 알면서도 손을 뻗게 되었다.



탁, 하는 작은 소리. 호무라는 깜짝 놀라 팔을 내쳤다. 토모에 마미가 신체적인 접촉을 꾀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에 상정하지 않았던 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로 호무라는 마미에게 잡혔던 제 왼팔을 등 뒤로 숨겼다. 



"...뭐하는 짓이지, 토모에 마미."



서둘러 숨기기는 했지만 호무라의 당황한 반응은 마미에게 어떠한 영양분을 제공한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행동으로부터 '응답' 받았다는 기쁨 덕인지, 표정이 한층 밝아진 그녀는 손에 들고있던 물건을 호무라의 눈 앞에 내밈으로써 한 번 더 호무라를 당황시키는데 성공했다.



"아케미 양, 밥도 제대로 챙겨먹고 있지 않지?"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지는 정적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조적인 투로 말을 이었다. 



"도시락이야."



마미의 눈짓에도 불구하고. 호무라는 제 팔을 앞으로 내밀지 않았다. 도시락을 받고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도 있고. 무엇보다 마미에게 들키지 않게 해야 할 것이 있었다. 자신의 이러한 행동이 토모에 마미를 상처 입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호무라는 끝내 마미의 친절을 거부했다.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그게 너의 대답이니?"



호무라는 천천히 마미를 응시했다. 마미 역시 지쳐있는 듯 했다. 목소리엔 힘이 없고 얼굴엔 피로한 기색이 가득했다. 팔다리는 힘없이 그저 늘어져있는 게 전부다. 어쩌면 자신의 몰골 역시 이러할 지도. 아니, 더 심하면 심했지 이보다 덜하진 않으리라. 그런 자조 섞인 감상을 품는 것도 잠시. 호무라는 뇌리를 스치는 강렬한 자극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머지 않은 곳에서 끔찍할 정도로 어두운 저주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수다. 마미 역시 그 기척을 느낀 듯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은 이렇다 할 말도 없이 자리를 박찼다.



토모에 마미와 아케미 호무라 둘은 굴지의 베테랑 마법소녀다. 둘이 힘을 보탠다면 마수를 처치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이 평상시의 두 사람이었다면. 문제는 호무라에게 일어났다. 그녀는 마수의 협공에 평소보다 한박자 늦은 반응으로 대응했다. 토모에 마미가 만전의 상황이었다면, 이러한 호무라의 분만큼 조금 더 많은 활약을 함으로써 싸움의 평형을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마미 역시 결코 좋다고 할 만한 몸상태가 아니었다. 제 앞가림을 하는 데에만 전력을 쏟아붓는 채, 닥쳐오는 마수의 공격을 쳐내고 반격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케미 호무라가 쓰러지는 건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무력화된 호무라는 삽시간에 추락했다. 이 모습이 마미의 어떤 면을 자극했는지는 모른다. 반격하는 것도 힘에 부쳐보이던 마미는 곧 무지막지한 화력으로 마수들을 일격에 쓸어버리고, 호무라를 향해 서둘러 달려갔다.



"...손 대지 마."



"가만 있어줘. 특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아케미 양보단 내 회복 마법이 더 뛰어나." 



그 말에 설득당했는지도 모른다. 호무라는 곧 저항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기절하거나 잠든 것은 아니고 그저 품에 안긴 채 마미를 올려다보는 게 거북한 모양이었다. 



"아케미 양 답지 않았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마치 큰 부상을 입은 채로 억지로 몸을 움직이는 듯한 굼뜬 모습이었다고. 그렇게 묘사하면서, 마미는 한 손을 호무라의 배 위에 얹었다. 따뜻한 노란빛의 마력이 마미의 손으로부터 발현된다. 치유가 진행되는동안 호무라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얌전히 안긴 채 눈을 감고있었다. 그 모습이 꼭 편안히 잠든 것만 같아서, 마미는 내심 그 순간이 지나가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미키 사야카가 원환되고 사쿠라 쿄코가 떠나간 이후로 두 사람은 이런 편안한 분위기로 있어본 일이 없었다. 관계는 파국을 맞은 듯이 억지로 뒤틀려져서 긴장된 상태만이 지속 되었을 뿐.



외견상 보이는 문제는 별로 없었다. 호무라가 정도 이상으로 지치고 피로해 보이긴 했지만 그건 어느 순간부터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의욕이라곤 없는 파리한 모습으로 걸어다니고는 했다. 그렇지만 마수와 싸우는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때보다 생기 있었기 때문에 사실 큰 문제는 되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있었다. 잘못된 판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제 생각을 고치면서, 마미는 재빠르게 호무라의 상태를 점검했다. 



본인이 눈을 감고 있는만큼 이런 기회가 언제 주어질지 모른다. 



'이 정도로 순종적인 아케미 양은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네.' 



호무라의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면서 마미는 새삼 감탄했다. 차갑기만 하던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확 달라졌다. 머릿결은 곱고 얼굴은 단정하니 예뻐서, 이렇게 정면으로 얼굴을 뚫어져라 보게된 일이 처음인만큼 감탄도 일었다. 아케미 호무라는 확실히 미인이었다. 다만 지금은 몸의 피로가 누적된 듯 안색이 창백하고 눈 밑이 거뭇거뭇 한 것이 흠이었으나 잘 먹고 잘 자게 된다면 금방 회복할 수 있으리라. 몸의 선은 얄상하고 품 안에 들어온 무게는 가볍기 그지 없었다. 가녀린 뼈대와 어깨선이 그대로 느껴졌고 조금만 강하게 압박하는 것으로도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으리라는 실감이 들었다. 곧게 뻗은 콧대와 창백하게 질린 입술. 한 손에 잡힐 듯한 얇은 목, 여린 어깨선을 지나 호흡을 따라 오르내리는 가슴, 배, 힘없이 늘어뜨린 가느다란 팔과 다리 등. 관찰을 멈추지 않던 마미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이르렀을 때. 마미의 눈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아케미 양, 이건..."



목소리가 흔들려나온다. 이와 더불어 자신을 받치고 있던 마미의 팔이 불안정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고. 눈을 번쩍 뜬 호무라는, 곧바로 마미의 손을 벗어나 제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왼팔을 뒤로 숨기며 작게 혀를 찼다. 가장 들켜선 안될 사람에게 좋지 않은 것을 들켜버렸다. 



"소울젬이!"



"내버려둬."



말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호무라는 그저 제 손을 숨기는 걸로 밖에는 대응할 수가 없었다. 마미가 따라서 몸을 일으킨다. 좋지 않은 여건의 몸상태로 마미에게서 도주할 수 있을까. 만전의 호무라였어도 힘드리라. 하물며 지금은. 



"아케미 양. 왼손을 보여주겠어."



"안돼."



"지금 내가, 허락을 받으려고 묻는 걸로 보여?"



무의미한 문답은 거기까지였다. 호무라는 기습적으로 활을 소환해내면서. 활시위를 당겨 마미를 겨누었다. 보랏빛을 머금은 마력의 화살이 당장이라도 쏘아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 채로 활대를 벗어나고자 준동한다. 활시위를 당기는 바람에 얼핏 보여진 왼손의 소울젬은, 가히 '어둡다'라고 칭할 수 있을만큼 검게 물들어 요동치고 있었다. 평소 그녀가 지니고있던 영롱한 밝은 빛은 이미 태반이 죽어 검은 파동에 갉아먹혀 그 생기를 잃고있었다. 명백히 소울젬이 한계에 달한 상태다.



"소울젬이 이렇게 될 때까지 정화하지 않았던 거니?"



"...더 이상 다가오지말아줘."



지금도, 앞으로도.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마미는 한걸음을 내딛었다. 핑,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이 춤을 추듯 내달려와 마미의 귀를 찢으며 지나간다. 이 압도적인 빠르기. 단순한 위협사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다한 것이 분명했다. 찢겨져나간 귓볼을 매만지면서, 마미는 그제서야 납득했다. 오늘따라 한 박자 느린 호무라의 움직임, 도시락을 건네주기 전 왼손을 잡혔을 때 보인 그 날카로운 거절, 지금에 와서 이렇게 명백하게 적대적 의지를 표명하는 이 모습은 전부.



아케미 호무라는 원환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정화를 거부했다.



그제서야 의문들이 해결되었다. 그녀가 이전에 자신을 향한 호의와 관심을 거부한 것. 쿄코가 '자살신봉자'라고 칭하며 거리를 두었던 것, 마미의 조언이나 도움을 거절하다 못해 싫어하던 모습 전부가. 사실은 자신의 종말을 바라서였다고.

그런 모습,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사람이 죽는 것을 지켜보라고. 이전의 쿄코라면 때려서라도 말리지 않았을까. 지금은 호무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마미 자신 밖엔 없다. 이 시점에서 생각을 마치고, 마미는 팔을 휘둘러 순식간에 대량의 리본을 소환해냈다. 



이 명백한 적대적 태도에. 호무라 역시 이를 악 물며 전투의 채비를 갖춘다. 오염 직전의 소울젬으로 남은 마력이라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의 정도 밖에 없는 아케미 호무라. 다소 피로하긴 하지만 충분히 여지가 있는 토모에 마미. 결착을 짓는 데는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더 이상의 마력 소비 자체를 금하겠다는 듯이 리본은 순식간에 호무라를 억죄고 들어와 그녀의 신체적 자유를 박탈시켰다. 



"왜. 왜 정화하지 않으려는 거야?"



여기까지 와서 문답을 나누려고 하나. 호무라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원환의 이치와 마도카, 그 둘 사이의 연계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리 한다고 해서 마미가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 어떤 시점에 어떤 방법을 써도, 토모에 마미와는 좀처럼 대화가 통하는 일이 없었다. 피곤할 정도로.



"...아케미 양?"



어떤 말에도 돌아보는 일 없이. 호무라는 그저 시선을 피한 채로 입을 다물었다. 이 모습이 마미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녀는 다시 한 번 거부당했음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호무라의 이름을 부르던 것도 잠시. 마미는 곧 정신을 차린 듯이 덩달아 입을 다물곤 사방에 흩어진 채로 내버려져있던 큐브를 주워모았다. 마미는 가득 모은 큐브를 품에 진 채로 다가와서, 호무라의 왼팔의 결박만을 가벼이 풀어내었다. 



"잠, 하지마...!"



"...이유를 알려줄 수 있겠어? 아케미 양."



말미를 주듯이 묻는다. 호무라는 제 앞에 선 마미와 그 품안의 마수의 흔적들을 바라보면서, 흔들리는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말한다고 해도, 당신은 이해 못 해."



"...그래?"



그럼 나도. 더 이상 말 하지는 않을게. 중얼거리는 것을 끝으로, 마미는 제가 들고있던 큐브들로 순식간에 호무라의 소울젬을 정화해내기 시작했다. 소울젬을 갉아먹던 검은 탁류는 큐브에 의해 빨려나가며 차츰차츰 제 안에 품고있던 보랏빛을 드러내며 넘실대고 있었다. 제 몸을 구속한 리본과 마미를 원망스레 쳐다보면서, 호무라가 저항하기 시작했다. 소울젬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그녀의 저항은 거세져서, 그만큼 마미의 구속 역시 더욱 강력하게 호무라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제 몸을 억죄는 고통과 소울젬이 정화되어간다는 사실 앞에 발버둥 치는 호무라의 노력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의미 해져간다. 차갑게 내리앉는 적막 속에 오로지 소울젬과 큐브만이 어둠을 집어삼키며 빛나고 있었다. 호무라의 소울젬이 거의 완벽하게 밝아지고, 오염을 흡수하는 일을 대충이나마 마쳤을 때. 그제서야 마미는 전부 소모한 큐브들을 땅에 내버리며 작게 웃었다.



"...만족해...?"



작은 소리로 들려오는 물음은 꼭 울음과도 같이 울려온다. 제 두 눈에서 일렁이는 눈물과 절망을 뱉어내면서, 호무라가 입술을 짓씹는다. 항상 차가운 가면과 벽을 쳐놓고 먼 거리에서나 일렁이던 그 눈빛이. 마미와 만난 이래 가장 솔직하고 담백하게 호무라의 마음을 담아내 빛나고 있었다. 



"이거 봐, 아케미 양. 할 수 있었잖아, 우는 거."



"...토모에 마미."



왜? 아케미 양. 상냥하게 웃는 그 미소가 오싹할 정도로 가증스러워서, 호무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눈물만이 넘실대며 리본 위로 똑똑 떨어져 내렸다. 저항이 덜해진 만큼 리본의 압박은 줄어 들었지만 호무라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저 마미만을 일렁이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해줄게 아케미 양. 몇 번이든."



당신이 죽게 하지는 않을 거야. 차분하게 미소지으면서, 마미가 손을 뻗는다. 호무라의 눈물 젖은 볼을 어루만지면서 마미가 작게 입을 열었다.



당신을 지켜줄게. 













-15.05.21

Posted by 까망베르 베베
Backup - etc2018. 9. 17. 03:00

광휘?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주제에 눈속임으로 번쩍 거리기나 하는 그런 조잡한 마법은 부숴지는 것으로 그 가치를 다할 따름이다. 그 어떤 조예도 미학도 없는 단순하고 맹목적인 이 투박한 빛줄기는 마치 무예를 비웃는 듯 가벼웠다. 직선적으로 날아드는 포박형 마법을 가볍게 피해내면서, 카타리나는 그 같잖은 저항을 비웃으며 턱을 까닥였다. 군인이랍시고 지팡이를 치켜든 금발의 어린 소녀가, 땀과 피에 젖어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서있는 그 몰골은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만족스럽다. 의아할 정도였다. 갓 어른이 된 듯한 새파랗게 어린 계집아이가 단단한 갑주를 입고 전장을 누비는 그 모습이 어찌나 아이러니 한지. 같잖다. 그건 너무도 한심한 일이었다. 제 앞가림 할 주제도 되지 않는 것이.

"너의 그 훌륭한 조국은 이미 너를 버린 모양이구나."

그렇기에 박살내고 싶었다. 소녀가 입술을 짓씹는다. 뻔한 도발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그 모습은 패잔병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풋내 나는 애송이."

죽이기에도 모자라. 그럴 듯한 반항도 해보이지 않고 그저 무력하게 빛이나 날려대는 모습이 도대체 어딜 봐서 군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겁에 질려 벌벌 떨며 도망가기에 바쁜 사슴 새끼잖아. 이런 걸 군인이라고. 데마시아의 그 무지한 정의 족속들은 역시 쓰레기와 다를 바 없다. 

"...닥쳐."

과연. 마른 입술을 핥아내며, 카타리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내내 칼에 베이고 얻어맞더니만 제일 처음으로 한다는 말이, '닥쳐'다. 거친 호흡에 의해 떨려나온 짧은 마디였지만 목소리를 감상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강직하고 직선적인 그 바보같은 성정이 그대로 내다보이는 단정한 목소리였다. 신음 한마디 흘리지 않더니만 굳이 이제 와서 목소리를 들려주는 이유가 뭘까. 유언? 아무래도 좋다. 흥이 돋았다. 손에 든 단도를 던졌다 받으면서, 카타리나는 천천히 마른입술을 핥았다. 

"좋아. 내기를 하자, 애송아."

"...누구 마음대로...!" 

"1분을 줄 테니, 갈 수 있는 만큼 가봐." 

눈썹을 찌푸린다. 고심하는 듯한 눈빛이 약하게 흔들린다. 아무래도 좋다. 정말로 내기에 응해서 도망쳐도 재밌겠고, 이 자리에서 덤벼와도 나쁠 건 없을 것이다. 뭐가 어찌 됐든 결론은 저 얄상한 목에 시퍼런 칼날이 박히는 걸로 끝날 것이니. 무력하게 주저앉아 있는 새끼 동물보다야 실낱 같은 희망에 몸부림 치는 자를 죽이는 것이 더 즐거운 일이긴 하다만.

"...으읏...!"

소녀는 고민하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카타리나를 등진 채 바로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흙 위를 짓밟고 뛰쳐나가는 그 몸짓. 맥동하는 사슴의 혈관. 하얗게 질린 얼굴을 수놓는 땀과 핏방울을 사방에 떨쳐내며 도망하는 꼴이란! 지팡이를 꽉 쥔 손아귀와 무거운 군장을 인 그 얄상하고 가느다란 등과 허리엔 지금 당장이라도 단도를 꽂아넣을 수 있었다. 한 번 손을 쓰는 것만으로 저 무방비한 등을 찍어누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나비처럼 비틀거리다 무력하게 쓰러지겠지. 흐음. 작게 코웃음을 치며, 카타리나는 제 손으로 천천히 칼날을 훑었다. 그녀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이 기괴한 형태의 단도는 찌르고 벨 때의 그 맛이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린 살을 매끄럽게 헤치고 들어가 그 섬세한 근육과 뼈를 짓이기며 뽑아내는 칼. 이 단도로 행하는 그 살인의 쾌락은, 카타리나 뒤 쿠토 그녀 인생의 유일한 낙이었다. 저 데마시아의 어린 계집 역시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쾌락을 선사할 것이다.

1분. 

비스듬히 솟은 칼날을 서로 맞댄다. 손에 힘을 주어 부드럽게 훑어내리니 귀를 아리는 높은 소리가 울려왔다. 그녀는 끼기기긱 거리는 그 칼날의 불협화음을 조국 녹서스만큼 사랑했다. 사슴 사냥의 시간이다. 상처입고 지친 어린 마법사와, 고양이보다도 날렵하게 단련된 암살자의 추격전이다. 칼날을 감상하는 것도 잠시, 그녀는 순식간에 소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추격은 빨리 끝났다. 카타리나는 굵은 나뭇가지 위에 제 몸을 맡긴 채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작게 혀를 찼다. 무력해라. 무력해. 가소로울 정도다.

"기껏 시간을 줬는데. 이게 전부인가봐?"

"아..."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작게 탄식하며 소녀가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단도를 쏘아냈다. 썩어도 준치라 했나. 소녀는 가까스로 지팡이로 단도를 쳐내고, 작게 신음하며 제 손을 부여잡았다. 단도를 쳐내는 와중에 손가락을 베인 것이 분명했다. 제 바로 아래에서 이를 갈며 저를 올려다보는 그 새파란 눈동자는 방금 전까지 도주하던 패잔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도전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감상을 방해하듯이. 핑,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목전으로 빛의 구슬이 날아들었다. 보이는 건 그저 조금 눈부신 성가신 구슬 같지만 맞았을 때의 파괴력은 무시무시하다. 이를 잘 알기에 카타리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나뭇가지를 발판 삼아 앞으로 도약한다. 몇 번의 가벼운 공중제비를 끝으로 날렵하게 착지하면서, 견제의 목적으로 두 개의 단도를 날려보냈다.

"아윽!"

막을 수단이 없었던 모양이지? 한 개는 그 알량한 마법으로 어떻게 막아낸 모양이지만 다른 하나마저 막을 재량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소녀는 칼날이 틀어박힌 제 왼팔을 고통 서린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 놀이는 이제부턴데." 

벌써부터 떨면, 어쩌려고 그래. 혀로 입술을 축이며, 카타리나는 깔깔 대며 웃었다. 조국의 명예를 위해 두 눈을 부릅 뜨고 전장에 선 어린 마법사는 어디 갔는지. 그저 순한 양 한마리만이 제 앞에 남아 덜덜 떨고 있었다. 가볍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는 뒷걸음질 치지도 못하고 얼어있는 소녀의 앞에 우뚝 서서야 그 고통으로 잔뜩 찌푸려진 예쁜 푸른눈을 볼 수 있었다. 눈물이 어린 눈으로 카타리나를 무력하게 쳐다보면서. 소녀는 입술을 떨었다. 소녀의 어여쁜 금발이 땀과 흙먼지, 제 것이 아닌 다른 이의 피로 얼룩져 눈 앞을 흩날리고 있었다. 

카타리나는 새 단도를 꺼내들고 시위하듯 소녀의 눈 앞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천천히 이루어진 움직임이었으나 그 몸짓엔 어떠한 힘이 있었다. 저항하며 눈을 돌릴 수도, 등 돌려 도망치지도 못하게 하는 강력한 압박이었다. 소녀의 갑주 사이 빈 틈. 그 하얀 목과 여린 어깨의 살결을 따라 음미하듯이 칼날을 부드럽게 움직인다. 차디찬 칼날이 생살에 닿았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생명의 위협 때문인지. 소녀가 움찔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워낙 날카롭게 다듬어진 칼날이라 그 작은 움직임에도 살결이 베였다. 날을 타고 새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단도에 새겨진 문양을 수놓는 그 적은 피를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카타리나는 심장이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 순간이다. 이 순간에 그녀는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제 손아귀 위에 타인의 생명이 놓이는 이 마지막의 순간. 누구보다도 가까이 생과 사의 경계에 서 생명의 죽음을 고하는 이 순간에 그녀는 삶을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죽이기엔 아쉬운 감이 있지. 카타리나는 파들파들 떨리는 그 여린 몸을 제 빈 손으로 가볍게 밀어제꼈다. 상상 이상으로 가벼웠다. 떠밀려 주저앉은 소녀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으로 카타리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공포와 고통, 분노, 슬픔, 알 수 없는 어떤 감정과 그리고 의문이 뒤섞인 눈빛이 카타리나의 모습을 담고있었다. 

가장 먼저. 그녀는 소녀의 심장 부근에 단도를 내뻗었다. 그대로 찌를 듯이 칼날을 치켜 올린다. 소녀의 눈을 마주보면서 카타리나는 이 일련의 행위를 즐기고 있었다. 소녀가 죽음을 각오한 듯한 눈을 하자마자, 목표를 옮겨 갑주의 연결부위를 베어내렸다. 쨍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소녀의 상반신을 감싸고 있던 갑옷의 일부가 바닥으로 떨어져내린다. 갑주 아래에 입는 몸에 딱 달라붙는 재질의 가죽옷만이 소녀를 감싼 채 온전히 남아있었다. 

명백히. 희롱하는 행위였다. 

"카타리나 뒤 쿠토...!" 

소녀가 분노에 차 그 이름을 부르짖자, 카타리나는 뒤이어 소녀의 남은 옷마저 칼날로 베어냈다. 탐스러운 살결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쇄골과 소녀답게 아름다운 형태의 가슴, 새하얀 살결을 자랑하듯 호흡에 따라 오르내리는 예쁜 배와 허리. 앙증맞게 패인 배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갑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몸매가 순식간에 카타리나의 눈 앞에 보여지고 있었다. 소녀가 성한 손을 들어올렸다. 제 상체를 가리겠다는 그 심정이 보여서,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이 카타리나가 팔을 잡아챘다. 여린 팔목을 짓누르듯 찍어눌러 제압하고. 엉거주춤 앉아있던 소녀를 떠밀어 눕힌다. 바닥에 눕혀진 소녀는 거의 공포에 질려 허우적대며 몸을 움츠리려 했다. 

가소롭기는. 카타리나가 소녀의 왼팔에 박혀있던 단도를 아무렇지 않게 뽑아올리자,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치떴다. 째지는 목소리와 피가 허공을 수놓으며 자욱이 퍼진다. 봐주지 않겠다는 듯이, 카타리나는 가볍게 웃으며 소녀의 하얀 배를 맨 손으로 쓰다듬었다. 언제든지 이 곳을 찔러버릴 수 있었다. 무언의 행위에 소녀가 몸을 파들파들 떨며 카타리나를 올려다본다. 공포와 고통, 분노, 몇몇의 감정과 의문으로 뒤섞여 있던 그 어여쁜 푸른눈은 이제 사랑스러울 정도로 여리게 떨리고 있었다.

카타리나는 욕망에 이끌리듯 그 눈에 입맞추고, 소녀의 입술을 매끄럽게 핥아올렸다. 입술을 열지 않으려 하는 자그마한 반항에 분노해 명치 즈음을 세게 내리치자 그제야 가쁜숨을 내쉬며 소녀가 입을 벌렸다. 그 여린 입술을 탐한다. 주저하지 않고 가지런한 치아와 입천장, 피맛이 나는 입술을 핥고 빨아올리며 들썩이는 몸을 재차 짓눌렀다. 그 깊은 곳 안에 엉거주춤 굳어있는 혀를 제 것으로 자극하는 순간, 소녀가 이를 악 물었다. 

"윽."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거절을 한다고. 얼얼한 혀와 피맛이 나는 침을 삼키며, 카타리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이었다. 이런 식의 반항은. 소녀는 경멸한다는 듯한 눈으로 카타리나를 올려다보며 제 입술을 마구 짓씹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이 가만히 두고볼 수가 없다. 

"이 가소로운 애송이가 감히."

우악스럽게 가슴을 쥐어잡았다. 같은 여자로서 그녀는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여자가 고통스러워 하는지 잘 알고있었다. 가슴을 거칠게 쥐어잡고, 쥐어짜듯이 손아귀에 힘을 가했다. 비틀어 꺾으며 손톱으로 그 여린 살을 짓눌렀다. 강한 손아귀 힘으로 압박하자 소녀가 발버둥을 치며 카타리나를 밀어내려 애쓰기 시작했다. 아무렴, 저항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눈은 소녀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카타리나는 그 반응을 즐기듯 가슴을 쥐었다 풀어줬다 했다. 와중에 유두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자극하기도 했다. 

하지만 목적이 섹스가 아니므로, 굳이 정성들여 애무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소녀의 모든 것에 대한 정복이었다. 그 생명과 목숨 뿐만 아니라 신체의 모든 자유, 가령 예를 들자면 순결이라든지 혹은 성감 같은 소녀가 이전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신체의 모든 권리 말이다. 그녀는 단도로 옷을 더욱 도려내기 시작했다. 고작 옷이나 잘라내라고 있는 칼은 아니지만 이 역시 하나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생명 뿐 아니라 그 외의 모든 신체적 가치를 희롱하고 조롱하는 행위 자체에 정복감과 만족감을 느끼면서. 카타리나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복부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니, 그제서야 소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카타리나가 어떤 목적으로 일을 벌이고 있는지 드디어 확신을 마친 모양이었다. 경멸로 일렁이던 그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소녀의 질 입구를 무심하게 쓰다듬으면서, 나머지 손가락을 이용해 아래를 훔쳤다. 특별한 애무를 한 건 아니어서 만족할 만큼 젖어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애액은 거의 나오지 않아 이대로 삽입한다면 꽤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알 바는 아니었다. 제 손가락을 질 안으로 쓰윽 들이밀면서, 카타리나는 소녀의 얼굴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차츰차츰 더욱 깊이 들어갈수록 소녀의 얼굴 역시 아름답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전에 이렇게 성적으로 타인을 희롱한 적은 없었지만 이 설명하지 못할 묘한 정복감과 카타르시스에 그녀는 가슴이 떨림을 느꼈다. 

"럭산나 크라운가드. 녹서스인에 의해 지배당하는 기분은 어때?" 

"...흐, 으... 으읏"

"...흥미로워." 

이런 상대는 없었다. 죽이는 것보다도 자신이 갖고싶어지는 상대는. 그런 욕심에 이끌려서, 그녀는 제 손의 움직임에 좀 더 힘을 가했다. 고통으로 덜덜 떨리던 몸이 손가락의 가벼운 두드림 한 번에 움찔움찔 아우성 치는 것이 가소롭지만 또한 그만큼 사랑스러웠다. 카타리나 뒤 쿠토가, 타인에게 '사랑스럽다'라는 감정을 느낀다고. 눈을 깜빡이면서 카타리나는 작게 실소했다. 한 팔이 열심히 치대며 움직이는 만큼. 그녀는 다른 손으로 럭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흠뻑 젖은 땀을 훔쳐내고 눈물을 닦아내며 찢어지고 튼 입술을 상냥하게 어루만져줬다. 상냥하게라. 내심 놀라면서도 카타리나는 제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럭스를 가지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기뻤다.

풋내나는 애송이 럭산나 크라운가드가 카타리나 뒤 쿠토의 마음을 떨리게 했다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 인정하는 자신이 있었다. 앞으로 어찌 해야 할까. 적대국의 귀족으로서 둘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존재였다. 원래라면 여기 이 자리에서, 럭스는 죽어야했다. 하지만 이제 카타리나는 럭스를 죽일 수 없었다. 이리도 아름다운 물건을 어찌 해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제 마음을 부인하면서, 결국 카타리나는 오른팔을 움직이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둘의 이 첫만남과 첫섹스가 럭스와 카타리나 자신의 관계를 잇는 신호탄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15.05.31


수위라기엔 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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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망베르 베베
Backup - etc2018. 9. 17. 02:59

큰일났다. 무너지는 건물을 피해 도망나오면서, 메두사는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느닷없는 붕괴 조짐에 설마설마 하는 생각은 들었다만. 언제나 설마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법이었다. 유일한 입구를 통해 달려나온 메두사는 곧 제 등 뒤로 들려오는 끔찍하고 우직한 우레소리와 온몸을 떨게 만드는 큰 진동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 온전한 건물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믿지 못할만큼 처참한 모습으로, 폭삭 내려앉은 돌더미들은 저들끼리 우수수 쏟아져내리며 메두사의 뒤통수를 두드리고 있었다.


"질긴 것들. 아예 건물에 묻혀 뒈져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혼비백산해 도망나온 메두사들을 맞은 건 나이프의 영원한 적수인 스푼의 히어로들이었다. 제 앞을 딱 막고 선 히어로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사나운 눈으로 당장에라도 달려들듯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낭패다. 명백한 핀치다. 하나같이 얕볼 수 없는 쟁쟁한 히어로들. 단단히 각오하고 나왔네. 내심 혀를 차면서도 메두사는 히어로들 가운데서 유독 빛나는 얼굴, 다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다나! 역시 너였구나! 친절한 환영 고마워~"


안 그래도 무서운 눈이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이 사납게 일그러진다. 즉각적인 반응에 만족하는 찰나, 다나가 이를 갈며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의식적으로 화를 가라앉히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다만 눈빛은 전혀 가라앉지 않고 번뜩이는 것이 의도대로 잘 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다나가 눈치채지 못하게 양 쪽의 전력을 비교해봤지만 역시나 승산은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모양인지 모르겠지만 자신들이 이 곳에 올 것을 깨닫고 진작부터 포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메두사가 기회를 노리며 눈을 돌리는 것을 알았는지, 히어로들 중 한명이 흘깃 눈치를 보며 다나를 부른다. 


"서장님?"


"됐어. 저 놈들 잡아라."


오래 가지는 않네. 메두사가 작게 혀를 차는동안, 오르카가 얼른 그녀 앞으로 서 싸울 태세를 취했다. 안 좋다. 히어로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둘을 둥글게 포위하며 비웃음을 지었다. 오르카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다나 앞에서는 쪽도 쓰지 못할 것이 뻔한데다 숫적으로도 우월한 상황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이 양반들은 여즉 뭘 하기에 이리 굼떠? 이 곳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뒷통수를 세게 후려줄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메두사 역시 싸울 태세를 갖췄다. 솔직히 기다려준 게 용한 일이었다. 


히어로들은 사방에서 동시에 덮쳐들어 오면서 그들의 특기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반절 이상이 오르카에게 향하는 것을 곁눈질로 흝어보고 제게 가해지는 총격을 피해 재빠르게 몸을 뒤로 굴렸지만 건물이 무너져내려 뻥 뚫린 공터엔 몸을 엄폐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느릿느릿한 섬유를 조종해서 총알을 막아낼 수도 없는 법이고. 게다가 근접 전투나 육박전 특화의 히어로들은 오르카를 상대하러 갔는지 메두사에게 온 히어로들은 하나같이 원거리 공격형이었다. 그러니까, 다들 멀리서 총탄을 마구 쏴댔다는 말이다. 한명만 가까이 와도 섬유를 이용해 잡아채 인간 방패를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요원한 일이 되었다. 하는 수 없다. 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메두사는 아직까지 크고작은 돌더미들이 쏟아져 내리는 허물어진 건물 사이로 제 몸을 던졌다. 허물어진 콘크리트 덩어리 위를 구르며 엉망진창인 몰골이 되었지만 몸에 구멍이 나는 것보단 나을 것이었다. 


"이러지 말고 대화로 풀어보는 게 어떨까?!"


아무렇게나 말을 내던지면서 메두사 역시 비상용으로 준비한 권총을 꺼내들었다. 상대가 다나라면 총으로는 흠집도 낼 수 없겠지만 히어로들을 상대로는 충분한 무기였다. 숨은 콘크리트 덩어리 위를 두드리는 총격에 고개를 내밀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총만 내밀어 견제사격을 가한다. 탕탕 거리는 총성만이 공터를 휘몰아치며 잠시동안 소강상태를 만드는 듯 했다. 확실한 일격을 꽂아넣으려면 필수적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콘크리트 파편 틈에 숨어있는 그녀를 공격해야한다. 누가 됐든 제일 먼저 다가오는 녀석은 벌집으로 만들어주리라 마음 먹으면서, 메두사는 온 신경을 집중해 권총을 꽉 쥐었다. 반푼이 같은 스푼이 건물까지 날려먹으며 실행한 작전이다. 무슨 수가 있어도 그녀를 잡으려 할 것이다. 건물이 통으로 우르르 무너져내렸으니 그 바보들이 뭐가 잘못 되었다는 걸 알고 빨리 도와주러 와주는 것 밖엔 답이 없었다. 그때까지 오르카가 버텨줄 수 있을까. 차마 고개를 내밀수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엉거주춤 앉아있는 사이였다. 


쾅, 하는. 예측불가능 할 정도로 파괴적인. 어이없을 정도로 커다란 포성과도 같은 소리가 귀청을 찢어버릴 듯이 울려퍼졌다. 귀가 멍멍하니 얼어붙어있는데 제 옆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돌벽들이 기초 철근이 뚝 부러진 채로 폭발하듯이 비산하며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개중에 작은 콘크리트 조각 몇 개가 메두사의 몸 위로도 후드득 튀어올랐다. 


"미친 무식한……"


더 이상 말도 나오지 않았다. 투시 능력자가 위치를 가르쳐주기라도 한 건지, 메두사의 바로 옆만을 휑 뚫어버린 사람. 다나가 제 손을 휘휘 털어 돌가루를 흩뿌리며 붉은 눈동자를 형형히 빛내고 있었다. 앉아있는 메두사를 천천히 내려다보는 그 눈엔 살의가 물씬 담겨 가히 오금이 저릴 정도로 날카로웠다. 


"…명색이 히어로인데 이렇게 건물을 날려먹어도 되는 거야?"


"어차피 철거예정이었다."


메두사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다나가 손으로 휑한 콘크리트 더미를 가리켰다. 겉은 차분해보이지만 속이 얼마나 들끓고있는지 목소리 톤이 잔뜩 낮아진데에다 레이저를 쏘는 특기를 가지기라도 한 듯, 희뿌연 흙먼지들 사이에서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두 말 할 나위 없이 무서웠다. 하지만 어쩐지 그 눈빛에, 그 정직할 정도로 단순한 일념과 맹목적인 분노와 살의가 오롯이 저만을 향한다는 데에서 희열을 느끼면서, 메두사는 씨익 미소지었다.


"역시 최고야 다나는."


"닥치고 죽어."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이. 다나가 손을 내뻗어왔다. 반항하지 않는 메두사의 목울대를 한 손에 움켜쥐고 천천히 힘을 주고 조여온다. 한순간에 목을 부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는 지금부터 널 죽일 거야, 라고 선고하는 듯이 점점 늘어가는 그 아귀힘엔 감동마저 느낄 정도였다. 다만, 상대가 다나라 해도 메두사는 이대로 죽고싶지는 않았다. 슬슬 목근육이 조여지고 숨이 막혀오는 즈음 해서 결국 메두사는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떨궜다.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할 법도 하지만 다나는 이미 메두사를 죽이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인 듯 했다.


그렇기에 살아날 수 있는 거다. 위에서부터 내리누르는 다나의 단단한 팔에 제 목을 맡긴 채, 메두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뱀이 나와봤자 붙잡아버리면 그만이라는 듯한 다나의 생각을 전부 읽을 수 있었다. 아, 이렇게나 다나를 잘 아는 건 나 밖에 없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잘 생긴 사람이랑 죽고 죽일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되었는지 아쉬워 하면서. 메두사는 괴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 랑해……, 다나."


그것은 분명 다나가 예측하지 못한 말이었을 것이다.


"개소리."


다나는 차갑게 내치듯 말하면서도 아귀힘이 살짝 줄어들었다는 것은 모르는 듯 했다. 슬슬 산소가 부족하다. 마음이 급해졌지만 메두사는 일을 재촉하지 않았다. 처연하게 미소지으면서 다시 한 번,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사랑해. 메두사는 살의로 가득차 분노로 번뜩이던 다나의 눈이, 화내지 않기 위해 부여잡고있던 한 줌의 이성으로 순식간에 물드는 것을 보았다. 다나는 분명 다시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여기서 메두사를 죽이느냐 살아서 잡아가느냐를 두고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으로 인해 눈물이 새어나왔다. 제대로 생각하고 있을 정신은 없었지만 메두사는 그 눈물을 이용하기로 했다. 힘없이 웃으면서 그저 제가 가진 모든 감정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사랑해 다나. 맛이 간데다 힘이 없어 맥없어 속삭이는 말이었지만 그게 어떤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했다. 다나가 천천히 제 손을 놓았다. 


"…백모래가 뭘 시킨 거냐."


콜록콜록 잔기침을 뱉으면서 메두사는 간신히 다나를 올려다보았다. 뭘 하려 했느냐고? 마음이 흔들려서 놔줘놓고는 이걸 물어보기 위해서 살려줬다는 듯 뻔뻔하게 나오는 태도가 귀엽기 그지 없었다. 이쯤되면 올 법도 하지 않느냐고. 애타는 마음을 간절히 숨긴 채 대답을 회피하고 기침만 내뱉고 있자니, 돌연 다나가 메두사의 턱을 잡아 올렸다. 강제로 고개를 들어올리게 해 눈을 마주치게 하는 탓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 했다. 무방비한 상태로 저 잘생긴 얼굴을 눈 앞에서 보게 되다니. 


"빨리 바른대로 말해."


"…말하면, 살려줄 거야?"


의도치 않게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눈물을 매단 채 떨려나오는 제 목소리가 자신이 듣기에도 처량하다 싶었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놀라있는 참에 다나가 메두사를 손에서 놓으며 눈을 찌푸렸다. 


"다시 한 번 목을 졸라줄까?"


"아니, 그건 거절하고 싶은데."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메두사는 갈등하면서 눈을 감았다. 여기서 이실직고 하고 고분고분 구는 것이 좀 더 오래 명을 연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주알고주알 정보를 불어댄 걸 들켰다간 백모래에게 어떤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살고 봐야 하지 않겠어. 결국 결심하고 눈을 뜨자마자 돌연 사방에서 홧홧한 기운이 덮쳐왔다. 자욱한 흙먼지를 불살라버리며 타오른 것은 새빨간 화염이었다. 메두사의 주위를 빙 두른 것으로 모자라 콘크리트 더미와 공터 사방에서 동시에 불타오르는 불꽃에 사방에서 비명소리와 탄식이 들려온다. 


"참 빨리도 오시네요!"


메두사가 잔뜩 맛이 간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자, 불 사이를 가로지르며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새까만 정장에 어딘가 촌스러운 색조의 꽃무늬 셔츠를 갖춰입은 다나와는 반대로, 온통 새하얀 정장을 입은 채 눈에 붕대를 두른 곱상한 남자와 녹색의 긴 머리칼을 휘날리는 피부가 새까맣게 탄 검사. 백모래와 송화였다. 송화가 일으킨 불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았던 탓에 다나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 배신자놈." 


기껏 가라앉힌 분노가 다시 차올랐는지 다나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진다. 다나가 한 눈을 파는 틈을 타 메두사는 서둘러 그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는 길에 챙긴 모양인지 송화에 어깨엔 거의 피범벅이 된 오르카가 힘없이 축 늘어져있었다. 황급히 다가온 메두사의 위아래를 천천히 훑어보던 백모래가 불바다 사이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태평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몰골이 엉망이 됐네?"


"이게 다 늦게오셔서 그런 거잖아요!"


어찌되었든 나이프가 무사히 전부 집합했다. 메두사는 그제서야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찾아오라던 건?"


"없어요. 그 전에 건물이 무너졌는 걸요." 


"그래? 아쉽게 됐네."


전혀 아쉽지 않다는 투로 툭 내뱉으면서, 백모래가 휘 고개를 돌려 다나 쪽을 쳐다보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얻은 게 없으니 혼나겠네. 다나 경질 당하는 거 아니야?"


"그럼 저희야 좋고요."


메두사도 뒤이어 다나를 돌아보았다. 백모래와 메두사 둘 다 놓치게 생긴 것에 낭패한 기색이 만연했다. 나이프 일원들을 한 차례씩 흝어보고 째려보는 그 성난 눈을 마주보면서 메두사는 베시시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을 흔들며 휙 등을 돌리자, 뒤에서 정체 모를 악소리가 울려왔다. 단단히 화난 모양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화나면 특기가 사라져서 크게 데일지도 모를 텐데. 남 걱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워진 제 상황에 웃음을 흘리며 메두사는 공터를 벗어났다. 










"그나저나 어떻게 살아남으신 겁니까?"


자꾸만 흘러내리려 하는 오르카를 아예 등에 업은 송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다나와 단 둘이서 일대일 상황을 맞아 살아돌아온 게 적잖이 놀랍다는 말투였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사랑한다고 하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겠어?"


"…아, 예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제 우문을 마무리 하면서, 송화가 눈을 깜빡였다. 그가 알던 다나라면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어떤 말을 듣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상황을 제 눈으로 지켜본 것이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정말 마음이 혹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간 들었지만 결국 생판 남인 그가 다나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모래가 랩터를 사랑해 미친짓을 벌였듯이, 사랑이란 건 결국 어떻게든 사람을 망쳐놓질 않던가. 그 역시 그 감정에 자유롭지 않았고 저 미친개 서장도 사람인 이상 사랑에 흔들릴 수도 있는 법이었다.

그는 잔뜩 헝클어지고 엉망이 된 메두사를 무심히 내려다보면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혹시 어쩌면 모를 일이었다. 




-15.08.18

본편 전으로 생각하고 썼어요. 나이프가 잠수타기 전이 2년 전인가 그러니까 딱 그 정도?

Posted by 까망베르 베베
Backup - etc2018. 9. 17. 02:59

새로 이사온 집은 생각보다 깔끔하니 아름다웠다. 어차피 혼자 살 집인데 넓어서 무엇 하겠느냐는 전제 하에 잡은 집이라 빈말로도 넓다고는 부를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늑한 자신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기쁨에 슬며시 미소지으면서 다희는 휘휘 제 옷소매를 걷어붙였다. 대다수의 짐은 이미 다 건너왔고 남은 건 청소 및 가구 재배치 뿐이다. 힘찬 노동의 첫걸음을 위하여! 환기를 위해 창문을 거칠게 열어제낀 다희는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순간적으로 닥쳐들어오는 찬공기에 한차례 몸을 떨었다.

다시 닫아야되나. 짧은 갈등에 활짝 열린 창 너머만을 멍하니 쳐다보고있는데, 시야 구석에서 무언가 거뭇거뭇한 점이 아스라이 보인다. 잘못 보았나 싶어 창 밖으로 휘 고개를 내밀어보니, 창가 바깥의 좁은 틈새 사이로 웬 털뭉치 하나가 움찔움찔 몸을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들어올려보니, 제 두 손바닥 안에 가볍게 들어오는 작디 작은 고양이다. 

"...?"

찬공기를 오래 쐬었는지 안쓰러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어대는 움직임에 일단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다희는 곧바로 고양이를 제 방 안에 내려놓았다. 어딘지 모르게 단정한 짙은 갈색 털에 먼지 하나 붙지 않은 깔끔한 몸, 깨끗한 얼굴이 딱 집고양이의 뽄새다. 여즉 떨어대는 가녀린 모습에 다희는 얼른 창문을 닫아걸고 조심스레 고양이를 안아들어 제 품 안에 집어넣었다. 집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일러도 틀어놓지 않아 집안 공기 역시 서늘하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따뜻하게 해줄만한 수단이 이것 말고는 없었다. 

"많이 춥냐?"

두 팔로 고양이의 몸 전체를 꼭 껴안으면서, 낯간지러운 느낌에 다희는 낮게 웃었다. 사실 제대 이후 갓 얻은 집이니만큼 이것저것 하고싶은 일들은 많았다. 그 중엔 애완동물을 길러볼까 하는 계획도 있었다.

"너 집이 어디야, 응?"

제 연속된 질문에도 고양이는 외마디 울음도 없이 그저 바들바들 떠는 제 몸을 다희 품 안에 깊숙이 묻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고양이의 등을 제 손바닥으로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다희는 인상을 찌푸렸다. 

일단 그런 창가 구석진 곳에 고양이가 어디서 뚝 떨어져 나타날 수는 없다. 가능성 있는 건 그냥 이 고양이가 어쩌다 창 밖으로 모험을 떠났고, 바로 제 집 창가로 폴짝 점프를 해서 왔다는 것이다. 어떻게 넘어오기는 했는데 다시 돌아가지를 못해서 바들바들 떨고있었던 건 아닐까. 

고작 새끼니까 먼 거리를 이동해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옆집에서 왔나? 일단 제 겉옷으로 고양이를 꽁꽁 싸매놓고, 다희는 다시 창문을 열어 제 고개를 창 밖으로 삐죽 밖으로 내밀었다. 왼쪽 집, 창문 닫혀있음. 오른쪽 집, 창문 열려있음. 

"야. 너네 집 찾은 거 같다."

이사떡이니 뭐니 하면서 이웃집들에 저 이사왔어요, 하고 인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결국은 옆집 초인종을 누르게 생겼다. 외투 안에 쏙 들어간 고양이를 옷째로 들어올려 품 안에 넣어놓고. 결국 다희는 집에 들어선지 5분 여 만에 다시 제 신발을 찾아신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지만 벌써 옆집 문앞이다. 흠흠 하고 헛기침으로 제 목을 다듬으면서, 다희는 조심스레 초인종을 눌렀다. 띵- 동- 하는 소리가 제 귀에도 들린다. 설마 집 안에 사람이 없나 하는 불안도 잠시, 곧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린다. 

"누구세요."

"아, 저 옆집인데... 뭐야, 라시현!?"

그리고 들려온 젊은 여자의 목소리에 일단 한 번 놀라고, 제 앞에 나타난 사람의 익숙한 얼굴에 다시 한 번 놀라면서 다희는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뭐야 대체 뭐야. 그냥 차분하게 안녕하세요 저 옆집 사람인데 혹시 이 고양이가 댁네 고양이가 맞는지요, 하고 물어보기만 하려고 했는데. 왜 라시현이 여기서 나와?

"...류다희?"

관심없고 무표정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던 여자의 눈빛이 곧 깨달음, 그리고 놀람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직접적으로 맞딱뜨리면서, 다희는 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냥 이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얘가 왜 여기서 나와? 제대하고 몇달 보지 않은 사이 전부 잊었었던 것만 같았던 기억이 물밀듯이 쏟아져내려온다. 뺨 맞던 기억, 얼차려 받던 기억, 욕 들어먹었던 기억, 되도않는 것으로 저를 갈구며 못 살게 굴었었던 기억, 매번 부딪치며 원수처럼 으르렁 댔었던 안 좋은 기억, 그러나 결국 열외 타고 말미엔 서로 말도 놓고 그럭저럭 데면데면하게 지내다 먼저 보냈던 기억. 사실 라시현이 제대하고 나서부턴 군생활도 영 밋밋하고 그저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무료하기만 했었다. 

순간적으로 찾아드는 제 이 감정이 반가움인지, 미운 정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아는 사람을 봤다는 놀라움인지 모르겠어서 다희는 그저 멍하니 시현의 얼굴만을 쳐다보았다. 그건 시현 역시 마찬가지라 둘은 별다른 말 없이 그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시현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너, 우리집은 어떻게 안 거니?"

"나 어제 이사왔는데."

"옆집? 그게 너라고?"

나긋하게 되묻는 물음이 딱 그때 그 시절, 수경 시절의 라시현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다희는 소름이 돋는 기분에 조용히 수긍하면서 제 품 안에 있던 외투 속 고양이를 슥 들어올렸다.

"니 고양이냐?"

"...걔가 왜 너한테 있니?" 

그러게, 나도 모르겠다. 어정쩡하게 서서 고양이만 슥 들어올리고 있자니, 제 등을 훑고가는 찬바람에 뒤늦게 추운 감이 들어서 다희는 부스스 몸을 떨었다. 고작 옆집 가는데 다른 겉옷 찾아입기도 귀찮아서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왔더니만 생각보다 날씨가 추웠다.

"...일단 들어와."

"뭐?"

고작 옆집인데 내가 뭣하러? 어차피 고양이 주인인 거 확인하면 고양이만 휙 던져주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다희가 주저하며 되묻자, 시현이 곧 조용한 눈빛으로 차분히 다희를 응시한다.

"류다희. 들어와."

어떤 말을 더 할까. 문 안에서 저가 들어오기 쉽게끔 자리를 만들며 비켜주는 시현의 모습에 결국 다희는 뒷말없이 조용히 집 안으로 제 몸을 들였다. 들어오라는 말에 자동반사적으로 들어와버린 것이 꼭 한창 때의 군인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제대한지 몇달이 지나서 이제 끝났다 하고 있었는데, 군복무 시절 같은 소대 선임을 만나니까 몸이 마치 현역 때처럼 움직여버렸다. 라시현이 그때처럼 저런 얼굴을 하면 다희는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여긴 사회야 류다희, 군대가 아니라고!'

소리없이 한탄하면서 다희는 조심스레 고양이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같은 오피스텔이라 시현의 집 구조는 제 집이랑 별 다를 바가 없다. 가구배치나 세세한 인테리어는 조금 달랐지만 그런 것에 눈이 가지는 않았다. 제 뒤에 라시현이 있는데 그런 것에 신경이 갈 리가 없었다.

"앉아."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시키는 대로 쇼파에 가서 앉고나니 그제야 집 안이 한 눈에 들어왔다. 고양이 집, 고양이 장난감 몇 개, 꺼져있는 티비 한대와 깔끔하니 새하얀 싱글침대. 조금 전까지 사람이 앉아있었던 듯 엇나가있는 의자와 테이블 위 홀로 켜져있는 노트북, 작게 웅웅대는 세탁기와 작은 냉장고, 따뜻한 바닥 아래에서 제 몸을 덮는 큰 옷을 빠져나오기 위해 조용히 바둥대는 고양이 한 마리와, 라시현. 

언제 들고왔는지 양 손에 따뜻한 김이 나는 머그잔을 든 시현은 곧 한잔을 다희에게 내밀었다. 자연스레 받아들고 한 모금 머금어보니 향 좋은 커피다. 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답답하고 막막하고 조금 아련한 것도 같고 반가우면서도 그에 못지 않게 어색해서, 다희는 그냥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는 기분으로 되는대로 입을 열었다.

"그, 고양이가 우리집 창 밖에서 떨고있더라고." 

"그래?"

그래? 그래. 어떡하라는 거지. 대화가 이어지지는 않는데 무슨 말은 해야할 것 같고 또 그러면서도 어떤 말을 해야할지 전혀 모르겠어서, 결국 다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제 손에 들린 커피나 홀짝이면서 시현을 보니, 저 멀리 떨어진 의자에 앉아서 홀로 고고하니 턱을 괴고 있는 것이 마치 전혀 관심없는 듯한 눈치였다. 

"제대한 지 두달은 됐니?"

커피를 홀짝이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시현이 다희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류다희?"

다른 생각을 하고있으니 고개를 끄덕여도 보지를 못하지. 속으로 툴툴 대면서도 다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치 바톤을 넘겨받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너, 너 고양이도 길렀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지만 사실 오랜만에 다시 만나고 얼마 안 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이기도 했다. 라시현과 고양이는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잘 어울리는 면이 있었다. 도도하고 얌전하고 나긋한 것 같으면서도 까칠할 땐 한없이 까칠하고, 날렵하고 사나우면서도 영악한 것이 시현은 딱 고양이 꼴이다. 속으로 둘이 딱 맞는다고 박수를 치면서 다희는 슬쩍 시현과 고양이를 번갈아보았다. 

"학교는?"

질문에 질문으로 되돌려주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제 질문이 씹힌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시현인 걸. 그냥 제 멋대로 저 좋을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홀로 납득하면서 다희는 그냥 어물쩍 대답을 얼버무렸다. 어차피 아직 복학하지도 않은데다 솔직히 복학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마음속으로 갈등도 일었던 탓이다. 군 제대 후 누구나 느끼는 일종의 막막함과 현실에 대한 유리감을 아직 벗어내지 못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 관한 질문을 들으면 딱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 얘기를 꺼내고 싶지도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적응 안되지?"

그래도 조금이나마 더 먼저 사제 공기를 맡았다고, 니 마음 다 이해한다는 식으로 툭 내던져지는 시현의 말에 다희는 그저 말없이 제 몸을 움츠렸다. 솔직히 그랬다. 시현이나 다희나 사회에 서면 그냥 둘 다 비슷한 입장의 비슷한 사람이겠지만, 언제나 라시현은 류다희보다 앞서나가고 있었다. 시현은 몇달 먼저 들어와 다희를 가르치는 선임이었고, 몇달 먼저 제대해 더욱 빨리 적응한 사회인이며 또 지금은 갓 제대한 의경인 다희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선배였다.

"류다희."

"응?"

"너, 술은 잘하니?"

"...뭐?"





*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둘은 마치 약속한 듯이 나란히 일어났고, 다희는 시현의 등 뒤만 쫓아다니면서 시현이 안내하는 술집으로 쏙 들어갔다. 제대하고 한동안 이 친구 저 친구 다 만나가며 앞뒤 안보고 술만 마시고 다닌 탓에 솔직히 술에 자신 있었기도 했고. 그래서 이 얘기 저 얘기, 의경 시절 얘기와 사회 이야기, 고양이 얘기니 뭐니 별 자잘하고 기억도 안 나는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공감하고 웃고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다. 제 집까지 제대로 걸어오지도 못해 비틀비틀 대고 길바닥에 드러누울 뻔 했다가 간신히 시현의 도움으로 오피스텔까지 왔던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제 집 앞에서 도어락을 눌러대다가 하도 정신이 없어서 엉망진창으로 틀려대고, 결국 문 앞에 머리를 처박아가며 열려라 참깨를 외치다가 시현에게 붙잡혀 집으로 끌려왔던 것까지.

그 모든 기억들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제 옆에 누워있는 라시현이 증명하고 있었다. 다희는 깨질듯이 아파오는 두통을 감내하고 부끄러움과 쪽팔림, 당황과 수치 등으로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가운데에서도 차근차근 제 기억을 되짚어갔다. 마지막 기억은 시현의 손에 의해 새하얀 침대 위로 눕혀지던 기억이다. 분명 저 혼자 드러누웠고, 편안한 느낌에 거의 기절하듯 잠들었던 것이 기억나는데 문제는 어째서 라시현이 옆에 누워있냐는 것이다. 더군다나 다희는 시현의 오른팔을 마치 베개라도 되듯 꼭 끌어안고 누워있었다. 지금도 제 품 안에 얌전히 안겨있는 이 마른 팔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은 혹시 그 반동으로 라시현이 깰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으으..."

전후좌우 구분도 안 가고 그냥 머릿속을 믹서기로 휘저어놓은 듯이 정신머리라고는 하나 없고 복잡하기만 한 상황이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다희는 그저 본능과도 같이 최대한 큰 소리 없이, 큰 움직임 없이 시현의 옆에 누워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고자 했다.

"아, 씨발..."

강제 얼음이 되어 누워있는 상태로 기억을 차분히 되짚어보니 일단 그것 외에는 딱히 실수한 것이 없는 듯했다. 토하지도 않았고, 주정부리다 라시현에게 욕설을 내뱉지도 않았다. 너 때문에 그때 존나게 힘들었었다라고 우물우물대며 말한 것도 같지만. 아, 미쳤구나 류다희. 무슨 정신머리로 이렇게 죽자고 술을 마셨니. 제 핸드폰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아서 시간을 아는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해가 뜬 것 같지는 않으니 그렇다면 아직 한밤중이거나 새벽일 것이다. 그러니 시현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것도 요원한 일이다. 

일단 팔이라도 빼내볼까. 군 시절 내내 견원지간 처럼 지내던 둘이다. 아무리 지금 사회에 나가 둘 사이 입장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그 라시현의 팔을 꼭 끌어안고 잠드는 꼴만은 피하고 싶었다. 꼬물락대면서 먼저 제 손가락 깍지를 풀었다. 슬슬슬 천천히 제가 부여잡은 힘을 풀어낸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소리없이 팔을 빼낸다. 한참 후,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다희는 제 두 팔을 시현에게서 완전히 떼어낼 수 있었다. 팔을 빼내기는 했지만 다희의 바로 가슴 위에 시현의 팔이 올려져있기 때문에, 다희는 이번엔 시현의 팔을 천천히 밀어내기로 했다. 부드럽게 반으로 접어서 시현에게 되돌려주면 아주 완벽한 탈출 그림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소리소문없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다희는 먼저 시현의 팔을 살포시 붙잡았다. 깡말라 살집 하나 없는 팔이 다희의 손 안에 쏙 들어왔다. 왜 이렇게 말랐대. 제대한 지 좀 되었으니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술도 많이 마시면서 여기저기서 살을 좀 찌웠을 법도 한데, 오히려 라시현은 제대 전보다도 조금 마른 것 같았다. 쯧. 제 몸관리 하나 못하면서 어찌 나라를 지킨다고. 이 깡마름이 불편하고도 조금 안쓰러워서, 다희는 슬쩍 고개를 돌려 누워있는 시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보고말았다. 재미있는 것을 본다는 듯 입꼬리가 올라간 부드러운 시현의 얼굴을. 놀라울 정도로 무방비한, 경계나 적의 따위 하나없는 부드러운 표정이어서 처음에 다희는 시현이 저를 보고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라시현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나, 하고 놀랐을 뿐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다희는 곧 제 가슴 위에 올라앉은 이 팔의 주인공, 제가 그렇게 열심히 치우려 고군분투하던 팔의 주인인 라시현이 저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간 다희가 그 팔을 치우기 위해 했던 모든 과정들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웃음기 담긴 입꼬리가 그 모든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왜, 더 해보지?"

죽고싶다.

보나마나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올랐을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다희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비명 지르며 발버둥칠 수만 있다면 분명 그리 했을 것이다. 다만 시현의 눈빛 앞에선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가소롭다는 듯, 그 발악을 지켜보겠다는 듯 비웃는 낯빛으로 내려보는 눈빛도 그러했지만. 이런 식으로 부드럽게 저를 바라보는 눈빛 앞에서도 결국 저가 무기력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류다희."

"......"

"류다희. 다희야." 

"...왜."

불러놓고 별 말 하지 않는 건 똑같았다. 잘하자, 라는 말이 귓가를 울린다. 라시현은 항상 그랬다. 먼저 이름을 불러놓고, 고저 없이 평탄한 낮은 목소리로 으스대지 않고 그저 한마디만 하고는 했다. 잘하자, 혹은 기억해둘게. 그렇게 오버랩되는 모습과 함께, 시현이 조용히 제 입을 열었다.

"얌전히 자."

발버둥 치지 말고. 덧붙여 흘러나오는 말에 결국 다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발버둥 치는 것도 멈춘 채 얌전히 천장을 쳐다보며 눈을 감는데, 제 가슴 위에 나앉은 팔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슬쩍 고개를 돌리면서 다시 말을 붙인다.

"저기, 팔 좀 치울게."

제 몸 위에 올라앉은 팔 하나 치우질 못하고 결국 슬슬 허락을 구하는 꼴이라니. 왜 라시현 앞에만 서면 이렇게 무기력해지느냐고 다희는 스스로를 구박하며 시현의 팔을 살짝 들어 내려놓았다. 

"...팔 달라고 아우성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러니?"

"뭐! 내가, 내가 그랬다고?"

"..."

그럴 리가 없다고 사실을 부인하려고 해도 찔리는 것이 있어서, 결국 다희는 제 손으로 얼굴을 푹 덮어버리며 으아아 한숨을 내뱉었다. 저 라시현이 먼저 제 몸 위에 팔을 올릴 일은 없을 것이니 결국 답은 그것 밖에 없다. 왜, 하필. 라시현이냐고. 어째서 이렇게 되었냐고 스스로에게 되물어봐도 답은 돌아오지를 않는다. 

좋아, 류다희. 잠도 다 깼으니 집으로 간다고 하자. 집으로 간다고 해버리자. 그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 뿐이라 결국 다희는 헐레벌떡 침대를 벗어났다. 그리고 바닥에 발을 내려놓고 한 발자국 떼자마자, 어지러움이 엄습한다. 숙취란 것이 언제나 그렇듯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두통은 사그라들었어도 어지럼증은 그대로였던 것이다.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엉거주춤 일어난 바람에 결국 다희는 넘어지듯 침대 위로 나동그라졌다. 바닥에 쓰러진 것이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야하겠지만, 아무래도 다희에게 다이렉트로 깔려버린 시현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윽...... 하, 류다희..."

고통어린 신음 속에 원망의 기운이 담겨있다. 다희는 시현의 안색을 살피고 미안하다 말하며 결국 다시 제 몸가짐을 가지런히 한 채로 침대에 얌전히 누웠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아파서 찡그린 시현의 낯빛이나 잔뜩 낮게 깔려나오는 신음소리와 자그맣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야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희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솔직히 그랬다. 시현은 집 안이라고 부드럽고 여린 몸이 다 드러나는 편한 골지 티셔츠를 입은 듯 했다. 그 바람에 신음하며 잠깐 몸을 비트는 사이에 그 여성스럽고 가냘픈 목이나 어깨선 등 전체적인 실루엣이 한 번에 다희의 눈에 들어왔다. 새삼스레 라시현이 마르고 얇고 가녀린, 정말이지 연약해보이는 체형의 소유자라는 것을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류다희, 너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니. 결국 다희는 숙취가 제 눈까지 미치게 만들었다고 고개를 뒤흔들었다. 그리고는 아까와 달리 천천히 조심스럽게 침대 밖을 나섰다. 침대를 등진 채 바닥에 조심스레 누워 아무 것도 못 봤다고 아무 것도 못 들었다고 주문을 걸며 질끈 눈을 감는다. 그런 제 등을 쳐다보는 시현의 시선이 찌르듯이 느껴졌지만, 다희는 결코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심호흡 하며, 차분히 말을 정리한다.

"여기서 잘게."

"바닥에서 잔다는 거니?"

"..."

"가지가지 한다, 류다희."

한숨과 함께 시현이 돌아눕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하고 침을 꼴깍 삼키면서 결국 다희는 어거지로 눈을 감았다. 다희는 이제 제 발 밑에서 야옹, 하고 우는 작은 고양이와 함께 잠들듯 잠들지 않는 긴 밤을 지새우게 되는 것이었다. 이웃집 사람이 라시현이라는 이 대단한 우연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면서, 부디 이 순간이 꿈이기를. 그러나 또 마음 한구석으로는 꿈이 아니기를 바라는 제가 있었다. 

모르겠다. 미운 것도 같고, 좋은 것도 같고. 하지만 사실 그런 감정보다는 그래, 그것이 제일 컸다. 다희는 시현이 반가웠다. 군대라는 특별한 공간 속에서 같은 시간과 경험을 공유한 사람을 사회에서 만나는 것은 굉장히 미묘하면서도 기쁜 만남이었다. 바로 오늘 같이 술잔을 나누면서 다희는 새삼스레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의경 라시현과 사회인 라시현은 다르면서도 같은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다름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면의 다름이다. 각박하고 모진 군대와는 달리 인간 됨됨이가 드러나는 사회, 개인적인 술자리에서의 교류는 그간 다희가 품고있었던 시현에 대한 시선을 무르게 만들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솔직한 제 기쁨과 기분을 음미하면서, 다희는 이 우연한 만남이 나쁘지는 않다고 조용히 시인했다. 잠시 뒤 침대 위에서 들썩이는 움직임과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얼마 안가 다희의 몸 위로 부드러운 천 이불이 내려앉는다.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어주는 시현의 모습이 보지 않아도 선하다. 라시현에게서 결코 기대해본 적 없는 이 친절과 매너에 소름이 돋는 것 같으면서도 그것이 기쁘게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다희가 시현에게서 어떠한 인간적인 선을 기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군대 내에서는 보여주지 않았던 라시현의 또 다른 면모 말이다. 

제 몸을 덮는 이불을 끌어안으면서 다희는 조용히 생각했다. 라시현은 어쩌면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전처럼 질색하고 기피할 것이 아니라 어쩌면 한두 번쯤은 더 만나고 이야기해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이 곳은, 군대가 아니니까. 

오늘 이 순간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이 다가가기엔 이미 다희 저가 상당히 취한 상태이고 창피한 감도 없잖아 있었기에 결국 그 새로운 마음을 내일의 자신에게로 토스하면서, 다희는 차분히 눈을 깜빡였다.













<설정> 

1. 류다희 얼굴이 라시현 취향 핵직격임. 라시현은 그래서 의경 생활 시작하고 다희가 후임으로 들어왔을 때 솔직히 개깜짝 놀람.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해서 잘해볼까 하는 생각도 없잖아 있었는데 의경 생활이 워낙 욕나오고 결국 성격 배리면서 다희가 막 동기 챙기고 민지선한테 뽈뽈 대며 꼬리 흔드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해서 사이 틀어지고 괴롭히기 시작한 것. 

2. 근데 제대하고 류다희 보니까 존나 말이 안 나옴. 일단 그 전에도 생긴 게 존나 취향이었는데 사회 나와서 가꾸기 시작한 다희라 안 그래도 이쁜 얼굴인데 외모가 아주 물 오른데다가 사복 차림에 뻑감. 고양이 안고 추워서 바들바들 떠는 것도 보호본능 자극해서 완전 마음에 듬.

3. 술 주는대로 잘 마시길래 잘 하는 줄 알고 계속 달림. 사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어느 정도 있기는 했는데 그래도 그냥 취한 게 보고싶었을 뿐이지 어떻게 해볼 생각까지는 없었음. 근데 애가 막 자기 집 문 앞에 머리 박고 문 열어주세요 하고 기도하고 있질 않나 결국 밖에서 그러는 게 불쌍해서 그냥 집에 데리고들어옴. 그리고 침대에 눕혀놓고 그냥 자긴 바닥에서 자려고 하는데 다희가 취해서 시현이 붙잡고 안 놔주질 않나 결국 못 이기는 척 침대에 같이 누웠음. 팔은 진짜로 다희가 잡고 안 놔준 거. 나중에 잠 깬 다희가 팔 빼내려고 낑낑대는 모습이 귀여워서 살짝 웃고있었음.

4. (미래) 류다희는 어차피 옆집이겠다 인연도 있겠다 라시현이랑 친해지고 더 알아가면서 의경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그 차이를 곱씹으며 시현이를 관찰하면서 재인식의 과정을 거치다가 결국 빠져버린다고 합니다. 시현이는 이미 한참 전부터 다희한테 호감이 있는 상태였고 결국 둘이 썸타다 사귈 듯.

5. 나중에 다희는 시현이네 고양이한테 우리집 창문으로 넘어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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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망베르 베베
Backup - etc2018. 9. 17. 02:57

미친년. 샹년. 개년. 시발년. 어떤 단어로 표현해도 부족할 것만 같은 여자가 있다. 영악하고 이기적이고 까칠하고 복잡해서, 감히 그 싸가지없음을 재단하기도 힘든.

"씨발!"

존나 까탈스럽기가 고슴도치보다 더한 년. 담배 필터를 씹어물면서 다희는 죄없는 가슴팍만 퍽퍽 내리쳤다. 속 안에 응어리 진 것이 오갈데없이 가득차 손발까지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은 터질듯이 박동해 제대로 호흡하기도 힘들었다. 분노로 부글부글 끓는 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라이터를 딸각이면서. 다희는 조용히 욕설을 내뱉었다. 별 것도 아닌 일이었다. 명령이 꼬였다. 두 상사가 각기 같은 일을 지시하면서 결과적으로 같은 일을 다른 방식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둘 모두 그들만의 방식이 있는 사람이라 어쩔 방도가 없었다. 각자의 방식에 맞춰 따로 진행하느라 진도가 더뎌졌고, 결과적으로 시간 내에 맞추지 못 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그 시발. 후. 라시현이 그걸 발견했다. 대놓고 다희의 능력과 일처리를 비꼬면서, 다희가 마무리 한 서류를 쓰레기처럼 내던진 것이다. 

'다희 씨 능력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 유두리 없이 그걸 곧이곧대로 따라들어서 실행해요? 틀린 것 같으면 알아서 제 선에서 수정하는 게 정답 아닌가?'

여기가 군대인 줄 알아요? 하고 비웃던 라시현. 갑갑하게 채워진 블라우스 단추를 거칠게 풀어내면서, 다희는 제 손 안에서 우그러진 담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장초고 뭐고 보이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칙칙 거리며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낼 뿐 불이라고는 올라오지 않는 라이터도 마찬가지였다. 손에 들린 모든 걸 바닥에 내던져버리고 가슴께를 쥐어뜯었다. 숨이 막히고 홧홧대는 열이 차올라오는 것이,

"홧병났니?"

"그래! 홧병 씨발 홧병!"

버럭 반사적으로 소리를 내질렀다가. 다희는 곧 얼음처럼 굳어졌다. 

"어, 저... 라시현 선배님?"

"왜? 류다희."

둘만 있다고 바로 말을 놓는 그 변화무쌍한 모습에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말을 잇지 못하겠다. 다희는 그저 낭패한 제 기색을 숨기기 위해 헛기침을 하면서 말없이 손바닥을 털었다. 손가락에 묻어난 담배 찌꺼기를 훌훌 털어내면서 어색하게 서있자, 군시절과 거의 변한 것이 없는 시현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불러놓고 제사 지내니?"

"...아뇨. 아닙니다."

"왜 그렇게 굳어있어?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다니?"

"..."

어떻게. 라시현을 군대 안에서도 모자라 사회에서까지 마주칠 수가 있을까. 어긋나도 잔뜩 어긋난 제 운명을 원망하면서, 다희는 입술을 짓씹었다. 군시절 내내 저와 반목하며 부딪히더니만 결국은 직장 상사로 다시 나타나 이제 새로이 저를 괴롭힌다.

"귀신 본 것처럼 서있지 말고 담배나 한대 줘볼래?"

"금연하신 거 아니셨습니까...?"

"누구 얼굴을 보니 담배가 다시 말리네. 안 좋은 기억도 조금 떠오르고."

전혀 힐난하는 기색없이 평탄한 어조로 중얼이면서, 시현이 냉막한 눈으로 다희를 응시한다. 그게 꼭 마치 다시 군시절로 되돌아간 것만 같아서 다희는 심란한 기분이었다.

"왜 그런 눈이니?"

니가 나보다 잘 알겠지. 마음속으로 중얼이면서 결국 다희는 시현에게 제 담배를 내밀었다. 바닥에 내던진 라이터도 주워들고와서 다시 불을 붙여올린다. 그런 제 행동을 지켜보는 시현의 눈빛이 마치 얼음장같이 차갑고 사무적이어서 다희는 찬찬히 소름이 돋는 듯해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전과 같았다. 소리없이 들이킨 연기를 제 앞에 대고 내뿜으면서, 시현은 차분하게 다희의 뺨에 제 한 손을 올렸다. 더 이상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 손길은 턱을 타고 목으로 내려가 잔뜩 풀린 블라우스 안의 다희의 하얀 살 위로 내려앉는다. 그 손길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서있는 채로, 다희는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짜릿한 긴장과 오한을 다스리기 위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후... 잘하자, 다희야."

흐릿하게 내려앉은 눈빛으로 다희의 쇄골께를 쓰다듬으면서, 시현이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1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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