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up - FE3H2019. 10. 8. 23:52

사랑의 4단계,

2. 호감

 

 

 

 

 

 

 

 

햇살이 창창한 가운데 소복하게 쌓인 간식과 감미로운 향이 감도는 테이블. 이제는 익숙해질 만한 다과회이나 몇 번이고 환영할 만한 즐거운 초대에 절로 피어오르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다. 부드럽게 풀어진 자세로, 그러나 결코 귀족적인 예절을 잊지 않으면서, 에델가르트는 베르가모트 티를 한모금 머금었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벨레스가 제 몫의 차를 따라내리는 모습을 응시하면서,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는다. 접시에 부딪치는 소리조차 없이 매끄럽게 찻잔이 자리를 잡는다.

벨레스는 분명 귀족은 아니었으나 차를 즐기는 법을 알고있었다. 또한 대화 상대로서도 손색이 없어, 몇 번인가 에델가르트는 벨레스가 다과회를 제의해주기를 제 쪽에서 기다린 적도 있었다. 

차를 마시던 벨레스와 눈이 맞닿는다. 눈이 닿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입가와 부드럽게 내리감기는 눈꼬리. 소리없이 피어나는 웃음을 띄우는 선생님의 모습. 에델가르트는 놀라 눈길을 흩뿌리고 제 찻잔 위에 급히 손을 올리면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향을 들이켰다. 익숙한 베르가모트 향기가 겨우 마음을 안정시키면, 진정된 목소리를 유지하려 노력하면서 천천히 입을 연다.

"선생님, 요즘 꽤 자주 웃게 된 것 같아."

몇 개월 간 표정 없는 담담한 얼굴만을 마주한 끝에 처음 선생님의 그 웃는 얼굴을 보게 됐을 때. 그 웃음을 눈에 담았을 때 에델가르트는 이 순간, 이 웃음, 이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을 깨달았다. 각인처럼 남아 시간이 흐르고 세월에 무너져도 그 희미하고 흐릿한 미소는 영원히 뇌리에 남을 것이라고. 에델가르트는 벨레스의 끝없이 삭막한 낯에서도 종종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은 옅은 감정의 편린을 엿보고는 했다. 마침내 막이 한꺼풀 벗겨진 것 같은 선생님의 첫 웃음이 그 정적을 깨트렸을 때, 에델가르트는 제 가슴을 부수고 텅 빈 속을 채우며 흘러갈 마음을 깨달았다. 평생을 깊이 새겨져 지워지지 않을 그 익숙하지 않은 감정. 슬픔보다 장대하고 분노보다 짙으며, 언제고 저를 흔들어 부술 수 있는 감정.       

"…에델가르트도."

"내가?" 

"베르가모트 티를 마실 때면, 항상 웃고있다." 

물론 그렇겠지 선생님. 당신과 같이 있을 때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니까. 힘없히 속마음을 집어삼키고 부드럽게 침음을 흘리면서, 에델가르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이 아무리 떫은 차를 권하더라도 내가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이 향기가 좋아."

"그런 것 같다. 그러고보니, 보드 게임을 좋아한다고 들었어."

"…보드 게임? 갑자기? 좋아하기는 하는데……."

설마하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벨레스가 허리를 숙여 티 테이블 아래로 몸을 옮긴다. 에델가르트는 놀라 눈을 깜빡이면서 벨레스가 테이블 아래에서 독특한 선물 상자를 꺼내드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에델가르트가 기억하기에, 저번주는 깜짝 선물로 곰인형이 등장했고. 그 전주에는 카네이션이 있었으며, 또 그 전에는…….

"선생님, 도대체."

"받아줬으면 한다. 선물이야."

어안이 벙벙한 채 벨레스에게서 상자를 넘겨받으면서, 에델가르트는 반사적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돌려줬다. 매 다과회마다 선물을 안겨주는 터에 이제 슬슬 적응이 될 법도 한데. 벨레스가 제 반응을 기대하듯 관심 깊은 눈빛으로 저를 응시하는 순간순간마다 에델가르트는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선물을 넘겨받을 때마다 몸을 움츠리거나 손을 떨지 않는 것이 결국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풀어봐도 될까?"

벨레스가 기대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선물을 받는 것은 에델가르트 자신인데, 이 순간을 가장 기대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니라 꼭 선생님인 것 같았다. 벨레스를 의식하면서 조심스레 포장을 풀어헤치고, 상자를 개봉하면서 에델가르트는 곧 탄성을 흘렸다.

깔끔하게 조각된 나무 말들과 매끈한 체스판이 상자 안에 꽉 들어찬 채 저를 맞는다. 에델가르트는 이미 원목으로 된 대형 체스 테이블과 대리석을 깎아만든 호화로운 체스말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눈 앞에서 덜걱 거리는 이 작은 선물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은 무가치한 나무 토막으로 전락할 뿐이었다.   

"…정말 고마워, 선생님."

에델가르트가 체스판에서 눈을 떼어내지 못하며 다시 한 번 인사를 전하자, 벨레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는다. 이전의 에델가르트였다면 자연스레 그 손을 피했을 것이다. 벨레스의 손이 제 손을 자연스럽게 덮는다. 에델가르트가 담담한 기색을 가장하는 동안, 벨레스는 에델가르트의 손을 포갠 채 그 아래에서 반쯤 열려있던 상자를 완전하게 들춰냈다. 

"한 번 해볼래?"

"……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에델가르트는 제게서 멀어지는 벨레스의 손을 그저 눈으로 쫓았다. 손등 위를 스쳐갔던 따스한 온기를 그리듯 눈을 깜빡인다. 그 잠깐 새에 벨레스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체스판을 세팅하며 말을 올려 세우고 있었다. 황녀의 앞에 백색의 유닛이 늘어서고, 반대편에는 자연스럽게 흑색의 말이 진을 친다. 

에델가르트는 정중앙의 폰을 집어들면서 조심스레 턱을 괴었다. 선생님과 체스를 두는 것은 처음이며 상대의 실력을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여태까지 관찰해온 바에 의하면 벨레스는 상식이 조금 모자란 듯 싶다가도 전략과 전술엔 매우 해박한 사람이었다. 진지하게 임해야 할 것이다.    

에델가르트가 선수를 끊자 벨레스가 자연스레 뒤를 이어받는다. 백말과 흑말이 순서를 교차하며 나무판 위에서 마주 서 그림을 그리고, 기물이 체스판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간간히 정적을 부술 뿐이다. 시선을 집중한 채 눈으로 상대의 말을 쫓는다. 폰들이 칼을 겨눈 채 서로 늘어서고, 나이트와 비숍이 칸을 뛰어넘고 고개를 내밀며 상대를 위협하기 위해 포진한다. 어느 정도 교착 상태가 형성되고 벨레스의 나이트가 에델가르트의 비숍을 위협하기 시작하자, 에델가르트는 작은 침음을 흘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전체 판을 내려다보며 잠시간 고민해보았지만 취할 수 있는 수는 두가지 뿐이다. 물러서거나, 맞서싸워 서로의 말을 교환하는 것. 에델가르트는 두어 번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마침내 비숍을 들어 벨레스의 나이트를 쓰러뜨렸다. 바로 다음 순간 뒤에 자리 잡았던 벨레스의 폰이 에델가르트의 비숍을 넘어뜨린다. 준비하고 있던 에델가르트가 쓰러진 기물들을 판 밖으로 옮겨내는동안, 벨레스의 숨 죽인 작은 웃음 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에델가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벨레스를 들여다보았다. 즐거운 기운을 띄운 벨레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붙여오며 미소 짓는다.

"……선생님?"

"마치 카스파르 같았다." 

"카스파르, 내가?"

"걸려온 싸움은 피하지 않지."

"……체스는 원래 그런 게임이야. 희생으로 대가를 쟁취하는."

에델가르트가 응수하자, 벨레스가 잡고있던 기물에서 손가락을 떼어내면서 눈짓을 한다. 에델가르트는 다음 수를 위해 자연스레 손을 뻗으며 벨레스의 부드럽게 말려올라간 입꼬리를 훑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웃음기를 감추지도 않은 채 그저 에델가르트를 잔잔하게 응시한다. 속 깊은 곳이 간질거리고, 벨레스의 눈길이 닿는 모든 부분에 기분 좋은 소름이 오르는 듯한 감각. 에델가르트는 작게 기침하면서 서둘러 말을 내려놓았다. 

"내 비숍이 카스파르라면, 이건 어때?"

에델가르트의 새하얀 나이트가 폰들 사이로 당당하게 고개를 내민다. 부끄러운 구석 하나없이 담대하게 나선 나이트는 벨레스에게 도전하듯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그러자 에델가르트의 얼굴과 나이트를 오가던 벨레스의 눈이 답을 찾는 듯 생각에 잠긴다.

"…흠, 페르디난트?"

"페르디난트? 내 나이트가?"

듣고보니 물러서지 않고 귀족적인 자태를 자랑하는 것이 조금 닮은 것도 같다. 에델가르트는 맑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건?"

"룩? 여태껏 한 번도 움직이질 않았지. 베르나데타가 떠오른다."

"움직이지 않아서 베르나데타인 거야?"

엉뚱한 발상이지만 벨레스의 말은 묘하게 얼맞는 구석이 있었다. 에델가르트는 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에 잔웃음을 뱉으며 즐거운 콧소리를 흘렸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말마다 도로테아, 페트라, 린하르트, 휴베르트의 이름이 뒤를 이어 따라붙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명되지 않은 두 개의 말, 퀸과 킹이 남았을 때. 

에델가르트는 제 퀸을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려세우며 벨레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선생님. 이건 내가 말하고 싶은데, 선생님은 나의 퀸이야."

말을 끝맺자마자, 에델가르트는 조심스레 제 입안의 속살을 깨물었다. 즐거운 기분에 저도 모르게 말을 뱉었지만. 자신을 너무 보여주지는 않았나. 꾹꾹 눌러 담아두고 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새어나가지 않았나. 에델가르트가 불안에 잠겨 조심스레 벨레스의 눈치를 보는동안, 벨레스는 눈을 크게 뜨는가싶더니 곧 천천히 내리감으며 바람과도 같은 웃음을 뱉는다. 

"영광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림처럼 떠오르는 그 맑은 미소란. 진정된 듯 싶었던 심장이 덜컥거리며 튀어오르고, 에델가르트는 그저 마른침을 삼키며 더듬더듬 손을 뻗어 제 옆의 찻잔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차를 들이마시며 벨레스의 눈을 피하고, 행복한 기운이 번져가는 고동을 무시하면서. 찻잔을 내려놓을 즈음엔 어떻게든 눈을 돌리지 않을 여유가 생겨서, 에델가르트는 떨리는 시선으로 그저 제 선생님의 웃음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본다.

"……나도 말해야겠는데."  

"…응?"

"에델가르트."

무슨 말을 하려기에 이리 뜸을 들이는가. 에델가르트는 벨레스의 웃음기 어린, 그러나 그 진지한 낯에 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 응답했다.

"듣고있어, 선생님."

"……너는 내 킹이다."

고저없이 담담한 목소리가 선언하듯 떨어지며 테이블 위로 쏟아져내린다. 에델가르트가 잠시간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침묵을 유지하는동안, 벨레스는 조심스레 눈썹을 찌푸리면서 에델가르트의 눈을 넌지시 쳐다봤다. 마치 제 눈치를 살피는 듯한 선생님의 그 움직임에 내심 놀라는 것도 잠시. 에델가르트는 점차 제 안에서 퍼져나가는 그 의미를 깨닫고 소리없이 입을 벌렸다.   

"……킹……."

"너는 내가 가장 아끼는 학생이다."

"…그, 그래, 선생님……."

"반드시 지켜야하는."

벨레스는 답지 않게 조금 조급한 어조로 뒷말을 덧붙이면서 테이블을 두드렸다. 에델가르트의 멍한, 그러나 잔뜩 달아오른 붉은 얼굴이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제 안에서 널을 뛰는 부끄러움과 기쁨에 작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가장 아끼는, 가장 아끼는 학생. 킹. 벨레스의 목소리가 남아 에델가르트의 귓가에서 멤돌기 시작한다. 에델가르트는 결국 지금 이 순간도 영원히 잊지 못할 빛나는 조각이 될 것이며, 긴 시간이 지난 후에도 제 안에 남아 흘러갈 것을 깨달았다. 

끝끝내 짊어지고 서야할 짐과, 눈을 돌리지 않고 맞서싸워야 할 앞이 보이지 않는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언젠가 이 짧은 기억은 그림자를 거두는 빛이 되어 부유하겠지. 그저 이 순간이 조금, 모래처럼 흩어져 나갈 잠시라도 좋으니, 조금만 더 오래 지속될 수 있기를. 곧 황녀는 다시 가면을 찾아 써야할 테지만, 이 작은 테이블 위, 선생님과 함께하는 순간만은 그저 에델가르트로 남아 웃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중한 순간은 조금이라도 놓칠 수 없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어 제 선생님을 올려다보면서, 에델가르트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되돌려줬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킹으로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어." 

언젠가 당신과 맞서야 할 그 순간까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어떤 마음으로 뱉어낸 말인지 선생님은 끝까지 이해할 수 없겠지. 제 마음을 찢어내는 말의 무게를 되새기며, 에델가르트는 다시금 차게 식어내린 베르가모트 차를 머금었다. 

 

 

 

 

 

 

 

- 19.10.8 

Posted by 까망베르 베베
Backup - FE3H2019. 10. 4. 22:35

사랑의 4단계,

1. 관심

 

 

 

 

 

 

 

 

사방으로 흩어진 흑수리반 일원들이 각자 훈련용 무기를 손에 쥔 채 연무장에 널리 퍼졌다. 제각각 기본 자세를 펼치고 여러번 스윙을 휘두르며 준비 운동을 하는 가운데, 에델가르트도 손에 쥔 도끼를 두어 번 휘둘렀다. 별다른 무게감 없이 도끼를 내리친 다음 가볍게 회수한다. 자루를 잡고 도끼를 제 팔 안에서 빠르게 몇 번이고 빙글 돌리면서, 거의 습관적으로 날을 위로 세운 도끼를 어깨에 늘어뜨린다. 비록 훈련용 무기라 하나 도끼 자체의 무게는 결코 무시할 수가 없을 터이지만, 에델가르트에게 이는 장난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연무장 중앙에서 팔짱을 낀 채 모두를 훑어보던 벨레스의 시선이 얼핏 제게 머무는 것 같기도 하다. 에델가르트는 작게 헛기침을 하면서 풀어져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오늘은 벨레스와 함께하는 첫 야외 훈련의 날이었다. 흑수리반은 그간 새로운 선생님의 지도 아래에서 짧게나마 적응을 마쳤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이론 수업 끝에 칠판을 두드리던 벨레스가 "오늘은 야외 수업이다." 라는 말을 뱉었을 때, 마침내 흑수리반 일원 사이에서 오가던 그 감탄과 흥분 어린 한숨들이란. 에델가르트는 벨레스의 실력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본 사람들 중 한명이었고, 따라서 이 새로운 선생님의 능력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다만 다른 흑수리반 학생들에게 이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벨레스의 실력을 궁금해했고, 에델가르트가 담담히 증언하던 그 위용의 일부나마 엿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했다.

"먼저 간단한 스파링을 하면서 기본기를 테스트 할 거야."

"혹시 선생님이 상대하는 거야?!"

"원한다면, 카스파르."

"물론 원하지, 선생님!"

카스파르가 당장이라도 뛰어나올 것처럼 도끼를 치켜 들었으나, 벨레스는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은 채 고갯짓으로 그를 물러나게 했다. 잠시간 흑수리반을 훑어내리던 시선이 다시금 에델가르트의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착각이 아니라면, 이 새로운 선생님은 에델가르트를 첫 타자로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에델가르트."

역시나. 에델가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어깨에 늘어뜨렸던 도끼를 한 바퀴 돌려 휘어잡은 후 천천히 벨레스의 앞에 자리를 잡는다. 자연스럽게 도끼를 쥔 채 벨레스를 마주하면서, 에델가르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쉬며 도끼 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누군가 훈련용 검을 던지자 벨레스는 눈도 돌리지 않은 채 제게 날아온 무기를 채어잡는다. 무게감을 체크하려는 듯 제자리에서 검을 몇 번 휘두른 벨레스가 마침내 눈썹을 까딱이면서 에델가르트에게 눈길을 돌렸을 때, 에델가르트는 긴장으로 몸을 굳히면서 자세를 잡았다.  

"먼저 전력을 다해 공격해봐라."

"…당신을 얕보는 건 아니지만 정말 괜찮겠어, 선생님?"

"걱정 마라."

"선공을 내준다면 사양하지는 않겠어."

에델가르트의 자신감 넘치는 도전에 흩어져있던 일원들 사이로 휘파람 소리가 샜다. 카스파르 혹은 도로테아겠지. 에델가르트도 이 새로운 선생님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다. 어느 정도까지 싸울 수 있을지 시험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벨레스가 덤비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했을 때, 드디어 에델가르트는 발을 앞으로 딛었다. 짧은 기합성과 함께 온몸을 굳히고, 두 손으로 마주잡은 도끼를 머리 위로 들어올린다. 허리를 비틀며 내딛은 걸음을 추진력으로 삼고, 높이 세워 든 도끼를 온 힘을 다해 내리꽂는다. 마치 벨레스를 두 쪽 낼 것처럼 떨어져내린 공격은, 그러나 다음 순간 벨레스의 패리에 의해 허무하게 튕겨져 나간다.

제 무너진 자세를 간신히 추스리면서 에델가르트는 헛숨을 뱉었다. 여태껏 에델가르트는 제 공격을 이리 쉽게 쳐내는 사람을 보지 못 했다. 두 손이 얼얼할 정도의 충격과는 별개로 상대의 힘에 대한 경악과 의문이 싹을 틔우는 가운데, 벨레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에델가르트를 내려다본다.

"힘이 좋구나."

힘이 좋다고 한마디로 끝날 공격이었나? 지켜보던 급우들조차도 놀라 웅성일 정도로 에델가르트의 공격은 파괴력이 있었다. 그러나 담담히 말하는 벨레스의 표정은 일말의 변화없이 고요해 사람을 납득시키는 면이 있다. 

잠시간 에델가르트를 응시하던 벨레스가 손을 내밀었다. 에델가르트는 별 생각없이 벨레스의 손에 제 도끼를 넘겨주었다. 자연스럽게 도끼를 받아가는가 싶더니, 별안간 벨레스가 한걸음 앞으로 다가선다. 에델가르트의 손을 휘어잡아 손가락을 감싸쥐더니 눈 깜짝 할 새 손목을 타고 올라가 팔꿈치를 눌러잡는다. 자연스럽게 팔꿈치를 타고 올라와 노니는 손길은 거리낌없이 에델가르트의 팔목을 부여잡고, 여린 살결을 누르며 맴돌기 시작했다. 벨레스가 제 팔을 잡아 옷 너머로 살을 꾹꾹 누르는동안, 에델가르트는 거의 얼음처럼 선 채 굳어졌다. 믿기지 않는 행위에 경악하는 것도 잠시, 에델가르트는 본능적으로 벨레스의 손을 잡아 떼어내며 날카롭고 매서운 눈으로 제 선생님을 들여다보았다. 

그제서야 벨레스가 손을 떼어놓는다. 그 순간 에델가르트는 이 무표정한 선생님의 잔잔한 눈 너머로 스쳐가는 낭패한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실례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는 별개로, 벨레스는 불안한 눈치로 두 손을 어정쩡하게 들어올리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묵직하니 가만 서있던 몸은 안절부절하지 못한 기색으로 흔들리고 동요없던 목소리가 가볍게 떨린다. 황족의 지위도 있어 에델가르트는 제 몸에 다가드는 이런 거리낌없는 접촉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 누가 황녀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댄단 말인가. 더군다나 에델가르트는 남과의 접촉에 대한 극심한 거부감을 가지고있었다. 그녀의 살 위로 가로새겨진 상처의, 아직도 이 몸에 남아있는 듯한 그 저주받은 끔찍하고 차가운 고통들. 타인과 접촉했던 매 순간마다 에델가르트에게 남던 것은 결국 가슴을 찢어발기는 슬픔과 결코 아물지 않을 흉터 뿐이다.

"…미안하다."

어리숙하지만 점잖은 사과에 에델가르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냐. 하지만 왜 이랬는지 설명해줄 수는 있겠지?" 

목소리에 날을 세우지 않으려 집중하면서 에델가르트는 느릿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사실 그 급작스런 접촉에 놀란 심장은 아직도 쿵쾅대며 아우성치고 있었다. 에델가르트의 노력을 안 듯, 벨레스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다. 

"확실히 너는 힘이 좋다. 근육이 어떤 식으로 붙었는지 확인하려 했을 뿐이다."

에델가르트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저를 추행하려 하거나 뭔가 다른 의도가 있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저 담담한 얼굴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저 궁금할 뿐이야.

"…선생님이 용병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그리 놀랍지는 않아. 다만, 다음에는 조금 조심해줘."

"명심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끝맺은 후, 벨레스가 다시 한 번 에델가르트를 응시한다. 맞붙어 오는 시선을 피할 이유도 없어 에델가르트가 그 푸른 눈결 속으로 말없이 빠져들어갈 때, 미지근하게 따라붙는 심박 소리가 귓가에 메아리 치기 시작했다. 저 담담하고 감정없는 눈길, 잔잔한 바다만큼이나 고요한 파도 속으로 침잠해 흔들릴 수 있다면. 깊고 검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는 그 의미 모를 것들을 들여다 보고싶어. 

 

……당신을 더 알고싶어. 

 

에델가르트가 그 푸른 눈동자와 제 생각 속에 잠겨있는동안, 벨레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분명한 웃음도, 흐릿한 미소도 아니었지만 쳐다보는 이까지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그 은은한 마법이란.  

"더 알아보고 싶은 게 있는데 한 번 상대해줄 수 있을까?"

"물론이야, 선생님."

에델가르트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자세를 잡았다. 돌려받은 도끼를 다시 잡아 늘어뜨리면서 다리를 벌린다. 이번에는 조금 전처럼 전력을 다해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상대해달라는 말은 몇 합이고 교환해 공방을 나누자는 말이다. 이제는 에델가르트 자신도 벨레스의 공격을 받게 될 지도 모르지. 

"잘 부탁하지."

벨레스의 말을 신호 삼아서, 에델가르트가 호쾌하게 선수를 취했다. 옆구리를 쳐낼 것처럼 휘둘러 들어간 도끼가 가벼운 블로킹에 막혀 비껴간다. 반발력에 개의치 않고 도끼를 빼내 찍어내린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 공격도 벨레스의 방어에 의해 단단하게 막아 쳐내졌다.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굳건히 공격을 쳐내는 벨레스의 움직임은 호승심을 자아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극도로 숙련되고 단련한 나머지 불필요한 움직임은 모두 삼간 채, 기계적으로 나타나는 가장 효율적인 동작들. 벨레스의 자세를 무너뜨리기 위해 몇 번이고 맹공을 휘몰아치면서 에델가르트는 입가에 기분 좋은 웃음을 띄웠다.  

제 힘을 이 정도로 받아내는 상대는 여태껏 만나보지 못했다. 철벽과도 같은, 태산과도 같은 단단함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공격이든 무위로 돌리는 이 유려한 걷어내기란. 티끌의 낭비조차 없이 극도로 정제된 힘으로 하나하나의 공격을 쳐내고 잘라내는 벨레스의 움직임은 경탄을 자아낼 정도로 깔끔하고 우아하기까지 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 하나하나엔 놀랄 만큼의 힘과 경험이 녹아있어, 에델가르트는 그 모든 상대의 합에 어우러져 무아지경에 빠진 듯 몸을 움직였다. 휘두르면 걷어내고, 내리찍으면 이를 쳐낸다. 막기 어려울 것 같은 공격은 민첩하게 몸을 돌려 피하고, 뒤따라붙는 연격에 검을 마주해 상쇄하면서 벨레스가 에델가르트를 응시한다. 맞부딪쳐 날카로운 소리를 토해내는 검과 도끼의 너머로 서로의 열띈 시선을 주고받으며 에델가르트는 재차 기합을 뱉었다. 정체 상태에 부딪쳐 머물러 선 검을 힘으로 밀어버리기 위해 칼날을 마주한 도끼에 더욱 압력을 가한다. 더 강한 무게를 싣기 위해 땅을 단단히 딛고있던 발을 떼어냈을 때였다.       

벨레스의 눈이 이채를 발하는가 싶더니 맞부딪쳐 교착하던 검이 부드럽게 뒤로 빠져나간다. 온힘을 다하고있던 에델가르트의 몸이 빨려들어가듯 앞으로 쏠려나가고, 곧이어 중심이 무너진 다리 사이로 벨레스의 발이 들어섰다. 

순식간에 무너져내리는 몸을 바로 잡지 못한 에델가르트가 도끼를 놓쳤다. 눈 깜빡할 새에, 하늘과 땅이 반전된 채 시야가 뒤집어진다. 맥없이 자세가 무너져 쓰러져 내리면서, 에델가르트는 눈을 크게 뜬 채 벨레스를 향해 저도 모르게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벨레스는 응답했다. 내뻗어진 손을 잡고, 바닥으로 떨어져내리던 에델가르트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끌어안는다. 민첩하게 에델가르트를 받아낸 벨레스가 에델가르트를 또렷히 내려다본다. 벨레스의 팔 안에 허리를 받쳐진 채 반쯤 쓰러져 안겨있으면서, 에델가르트는 저를 붙잡은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힘을 주며 마주 잡았다. 놀라 집어삼켰던 한숨이 터져나오고, 크게 뜬 채 굳어있던 눈이 안도로 내리감긴다. 

등 뒤로 뻗어나가는, 저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팔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안심하면서 에델가르트는 천천히 벨레스의 눈을 마주했다. 안정적으로 깜빡이는 벨레스의 바다와 같은 눈, 그리고 천천히 내리감기는 긴 속눈썹, 땀 한방울 없이 건조하게 메말랐으나 더 없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낯에 제가 담긴다. 고요하게 가라앉는 호흡 안에서 서로 몸을 맞춘듯이 기대어 벨레스의 눈을 들여다본다. 모든 것을 수용할 것처럼 깊고 어둡지만, 그러나 외롭고 차가운 물결은 아닌, 조용히 파도치는 맑은 밤과 같은 바다. 에델가르트가 마치 밤바다의 품에 온전히 안긴 것 같은 포근함의 여운에 취하는동안, 벨레스의 입꼬리가 천천히 호를 그렸다.

"실수, 실례했다."  

착각으로 느껴질 법한 그 짧은 웃음기는 곧 벨레스가 에델가르트를 일으켜 세워주면서 사라졌다. 놀라 넘실대는 심장 너머로 불안정하게 어긋난 호흡을 내뱉으면서, 에델가르트가 고개를 젓는다.

"…괜찮아. 넘어지지 않게 잡아준 거잖아."  

제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에델가르트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깐 새에 안겼던 그 팔의 온기와, 절대 그녀를 내버리지 않을 것만 같던 굳건한 단단함이 아직도 제 허리에 남아있었다. 안긴 품 안에서 어렴풋이 새어나오던 청량한 향기와 그리고 그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잔잔한 파도가 넘실대는 평온한 바다의 눈. 허리를 곧추세우고 몸을 바로 하면서 에델가르트는 조심스레 눈을 깜빡였다. 격한 스파링을 했던 탓인지 심장이 무서울 정도로 뛰고있었다. 저를 붙잡아줬던 손의 온기를 쫓듯 제 빈 주먹을 쥐었다가, 한숨과 함께 풀어낸다. 

"다치진 않았나? 얼굴이 붉은데."

"…아, 괜찮아. 고마워, 선생님."

벨레스가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들여다보듯 관찰하는 눈 앞에서 허리를 꼿꼿히 세운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는 것을 제외하고는 에델가르트는 실제로 털끝 하나 다친 곳이 없었다. 학생이 다치지 않은 것이 맞나 머리부터 발 끝까지를 훑던 벨레스의 눈길이 한바퀴를 돈 끝에 다시 에델가르트와 마주한다. 왜인지 모르게 그 눈을 피할 수가 없어 사로잡힌 것마냥 응시한다. 에델가르트의 새 선생님은 어딘가 흥미로운, 눈을 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벨레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에델가르트의 이마를 짚는다. 고개를 갸웃하며 에델가르트를 내려다보더니 어느 새인가 흘러내린 은백색의 머리카락을 귀 너머로 부드럽게 넘겨준다. 막으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겠지만, 에델가르트는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다만 점차 거세지는 제 심장 소리에 놀라 멍하니 생각했을 따름이다. 입 밖으로 심장을 뱉을 것 같다고 하는 말들을 이제는 이해하겠어. 

"…인상적이었다. 잘했어."

에델가르트가 무너진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푸는동안, 조용히 둘을 지켜보던 일원들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휴베르트가 손수건을 내밀고, 모두가 대단했다며 하나둘 입을 열며 칭찬하는 가운데 에델가르트는 조용히 옅게 땀이 맺힌 제 이마를 훔쳤다.  

"선생님! 다음은 내가 부탁해도 될까?" 

페르디난트가 손을 번쩍 들어 끼어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에델가르트는 천천히 발걸음을 뒤로 옮겼다. 차례가 바꼈음을 안 흑수리반 인원들이 다시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멀어지고, 에델가르트는 그들 모두를 뒤로 한 채 연무장의 구석으로 가 벽에 등을 기댔다. 팔짱을 끼고 스파링 준비를 시작하는 두 사람을 멀거니 쳐다보는 새에, 가벼운 인기척이 옆에 와닿는다.

"정말 멋졌어, 에디."

"……도로테아."

연무장의 한 가운데에서 창과 검을 섞고있는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에델가르트는 벨레스의 모든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직접 무기를 맞대는 것이 물론 제일이지만. 멀리서 여유롭게 관찰하는 것도 상대의 실력을 분석하기 좋은 기회 중 하나다. 다만 그런 에델가르트의 집중은 제 옆에서 키득이는 작은 웃음소리에 곧 산만하게 깨어져 나갔다.

"사실 나는 둘이 키스하는 줄 알았는데."

"……키, 뭐……?"

"에디가 선생님한테 안겼을 때. 둘이 얼마나 오래 쳐다보고 있었는지 몰랐지?"

"……."

에델가르트는 상상도 못한 발언에 말을 잃어 소리없이 입을 여닫았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 도대체 어떻게 선생님과 저를 그렇게 바라본단 말인가. 키스? 키스? 에델가르트는 제 옆의 도로테아를 휙 올려다보고, 그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 경험에 의하면 보통 그럴 때엔 자연스럽게 키스하게 되거든."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아니, 아니야."

"정말?" 

"절대 아니야, 도로테아. 선생님과 나를 그런 망상에 엮지 말아줘." 

"……흐음, 그렇단 말이지?"

도로테아의 잘게 쪼개진 웃음기가 마디마디마다 흩어져나와 에델가르트를 뒤흔들며 울려퍼졌다. 느닷없이 들어온 한마디에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팔짱을 풀어내리면서 에델가르트는 그저 소리없이 고개를 저었다. 자리를 피하듯이 도로테아로부터 벗어나면서 연무장 중앙의 벨레스를 흘낏 쳐다보자, 마치 짜맞춘 듯이 순간 눈길이 맞았다. 대련 중에 어찌 한눈을 파는가 하는 의문은 차치하고서. 에델가르트는 화들짝 놀라 데인 듯이 눈길을 피했다. 

부러 먼 곳을 쳐다보며 주의를 돌리는 것도 잠시. 곧 페르디난트가 내뱉는 비명소리가 연무장을 가득 메웠다. 놀라 눈길을 돌리자 바닥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고통으로 신음하는 페르디난트가 눈에 들어왔다. 페르디난트를 내던졌음이 분명한 벨레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든다. 이번에도 다시 눈이 맞았다. 에델가르트는 입술을 깨물며 페르디난트와 벨레스를 돌아봤다. 에델가르트와 달리, 이번에 벨레스는 페르디난트를 잡아주지 않았다. 등으로 착지한 터에 고통으로 몸을 트는 페르디난트의 모습에서 채 눈을 떼어내지 못하며, 에델가르트는 제 귓가를 두드리는 도로테아의 목소리에 재차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부터 누가 선생님의 애제자인지 알겠는걸?"

다시 한 번 심장이 요동했지만, 이번에는 격한 스파링의 탓이라 둘러댈 변명조차 없었다. 





-19.10.04




Posted by 까망베르 베베
Backup - FE3H2019. 9. 27. 22:33

그래서 에델레스가 어떻게 밀월을 즐겼는지 깊은 고민 끝에 그만

 

글을 찌고 만 것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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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가르트님은 쉬셔야 합니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벨레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웃는 듯 웃지 않는 듯한 미묘한 표정의 휴베르트가 돌연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지만, 벨레스는 더 이상 그 검은 인기척에 놀라지 않았다. 5년의 부재 끝의 귀환과 가치 있는 동행으로 휴베르트는 결국 벨레스가 에델가르트의 견고한 날개임을 인정했다. 이전과 같은 의심 어린 음습한 적의와 늪과도 같은 진득한 경계는 어느 새인가 물처럼 흐려졌다. 더 이상의 위기감을 느낄 필요도 없어, 벨레스는 휴베르트의 이런 정적인 등장에도 별 다른 감흥을 가지지 못하게 됐다. 

"이해 하시겠지만, 에델가르트님께 여유를 드리는 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해보지."

"…흠, 맡기겠습니다."

이전이었다면 제 주인의 안위와 관련된 사안을 이렇게 가볍게 부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허리를 가볍게 굽혀 인사함과 동시에 발소리조차 없이 물러가는 휴베르트를 응시하면서, 벨레스는 걸음을 돌렸다. 에델가르트를 보고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며, 다만 정무에 집중하는 황제를 방해하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 합당한 이유도 생기고 말았으니 정무실의 문을 두드려도 스스로를 책하지 않을 수 있다.

맑은 햇빛이 뒤덮은 고요한 복도 위를 담담한 발걸음으로 두드리며 벨레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에델가르트가 전날 밤에 돌아왔던가? 달빛조차 가라앉은 희미한 새벽의 끝에 소리없이 내려앉던 키스를 기억한다. 잠결에도 그 부드러운 입술과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얼굴 위로 쏟아져내리는 창백한 하얀 머리칼을 웃으며 쓰다듬고, 숨죽인 목소리로 인사하던 그 입가에 되돌려줬던 키스를 기억한다. 한밤중의 짦은 기억이며 곧 잠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기억하려 해도 그 이상 떠오르는 것이 없다. 더군다나 벨레스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 옆자리엔 이미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 들어와 언제 또 침실을 나선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벨레스는 눈썹을 찌푸렸다. 순백의 존재를 쓰러뜨린 후 포드라 전역이 이제 막 안정화에 접어든만큼, 벨레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많은 일이 황제와 그 내각의 손에서 처리되고 있을 것이다. 사실 며칠 간 벨레스는 에델가르트의 얼굴을 제대로 본 기억도 없다. 끝없는 정무와 군사회의로 에델가르트가 바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 

에델가르트의 정무실 앞에 발을 멈춘 후, 벨레스는 간단하게 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진지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황제의 관과 위엄을 걸친 무겁고 지배적인 분위기의 목소리다. 어린 학생일 때의 에델가르트도 진중했지만 기실 그것이 다분히 의도된 것이었다면, 어른이 된 에델가르트는 달랐다. 본인이 준비해온 황제의 책임을 짊어진 후 이제 에델가르트가 가진 진중한 위엄은 의도와 가장이 아닌 스스로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었다. 

"들어가도 될까?"

"선생님? 물론이야. 언제든."  

다만 상대가 벨레스라는 걸 알면, 그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근엄함은 눈처럼 녹아 사라진다. 황제의 단단한 표정을 벗어내리고, 그저 엷은 웃음을 걸친 채로. 창살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을 뒤로 한 채 에델가르트가 일어섰다. 내내 들여다보고 있었을 서류 더미가 에델가르트의 손에 의해 옆으로 밀려났다.  

"날씨가 좋아."

"그래, 그런 것 같네."

아무렇지 않게 짧은 안부를 주고 받으면서, 벨레스는 에델가르트의 책상 맞은편 의자에 허리를 내렸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한 채 둘은 잠시 서로의 눈을 들여다 봤다. 창가를 뒤로 한 채 등 뒤로 무너져 내리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있는 에델가르트는 조금 빛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청명한 자색의 눈동자가 소리없이 환대를 발한다. 

"…사실,"

"사실?" 

"날씨가 좋아서. 같이 밖을 걷고 싶어."

"산책 말이야?"

벨레스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쁜 제안이네. 기꺼이."

에델가르트는 잠시의 주저 없이 즉시 몸을 일으켰다. 집무실 한켠에 걸려있던 망토를 어깨 위로 둘러 매면서, 몇시간이고 앉아있었을 의자를 정리해 넣는다. 흔쾌히 일어난 에델가르트를 따라 벨레스도 몸을 일으켰다. 






***





둘은 정말 멀리 나오지 않았다. 수풀이 우거진 조용한 정원을 걸으며 두런두런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기분 좋게 머리칼을 쓰다듬는 바람에 웃으며 몸을 펴고는 했다. 발 맞춰 걷는 대화의 끝에 둘은 햇빛을 피할 겸 잠시 그늘을 찾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거대하게 솓아오른 고목의 널찍한 그늘 아래 나란히 어깨를 붙이고, 말 없이 서로의 팔을 끌어안는다. 별다른 대화없이 서로의 숨결만이 잠식하는 이 고요함. 벨레스는 제게 기대어 앉은 에델가르트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았다. 

"…선생님의 심장 소리가 듣고싶어."

벨레스는 천천히 팔을 열었다. 에델가르트가 기대어오듯이 몸을 누이면, 그 등을 끌어안아 제 품으로 이끈다. 에델가르트는 종종 이렇게 벨레스의 심박을 즐기고는 했다. 어느 새인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습관과도 같은 행위로 보통은 황제의 정복을 모두 벗어내린 침소에서나 하던 일이지만. 

벨레스는 개의치 않았지만 에델가르트는 제 황제의 관이 혹여 벨레스를 불편하게 하기라도 할까 몇 번이고 몸을 움츠렸다. 자세를 미세하게 바꿔가며 몇 번인가 고개를 숙이더니 마침내 뒷머리를 벨레스의 어깨에 기대 몸을 눕힌다. 

일정한 박자로 뛰어대는 심장에 맞춰, 그 평온한 리듬에 에델가르트의 숨결이 점점 가라앉아 간다. 벨레스는 에델가르트의 허리를 조심스레 끌어안은 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관 아래로 빠져나온 에델가르트의 은백색 머리칼이 벨레스의 목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간지럽기까지 한 얕은 감각에 작게 키득이면서, 벨레스가 입술을 열었다.

"잘 들리나?"

"…어느 정도는. 관만 아니었다면 더 잘 들었을 텐데."  
  
"자세를 바꿀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벨레스는 제 품 안에서 퍼져가는 따뜻한 온기에 미소 지었다. 사실 벨레스도 이 자세를 풀고싶지는 않았다. 확신치는 않지만 그건 에델가르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 팔 안에서 천천히 풀어지는 에델가르트의 몸을 느끼면서, 벨레스는 느긋하게 눈을 깜빡였다. 시원한 바람과 서늘한 그늘 아래의 이 평온한 휴식, 적어도 휴베르트가 믿어준 만큼은 잘 되어가고 있다. 

벨레스는 높게 솟은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결코 쉽거나 편하다고 말할 수 없었던 길을 걸었다. 앞서나가는 등이 외롭지 않게.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발을 다그쳐 걸음을 맞췄다. 한 번은 끊어졌던, 그러나 지금은 그 무엇보다 견고하게 이어진 둘의 길. 함께 걸었던 끝에 벨레스는 어린 황녀의 선생에서 이해자로, 그리고 마침내는 이렇게 황제의 어깨를 받쳐줄 수 있는 반려가 되었다. 운명이나 숙명과는 상관없이 그저 벨레스 스스로가 택한 길이다. 단언컨데 에델가르트와 함께한 지금까지의 여정 중 단 한 걸음도 후회를 품지 않았다.

머지 않아 벨레스는 에델가르트가 잠든 것을 깨달았다. 침잠하여 가라앉은 숨결과 힘없이 안긴 몸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게 기대어있었고, 약하게 흔들리는 고갯짓에 맞춰 황제의 관이 율동한다. 불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에델가르트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삐죽이 튀어나온 뿔을 피해 제 몸을 조절하고 품 안의 작은 몸을 더 안정적으로 껴안는다. 어느 정도 편안한 자세가 되었을 때, 벨레스는 차분한 숨을 흘려내면서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





"선생님."

"…아, 에델가르트……."

"미안해. 내가 잠들었었나봐."

"…불편하지 않았나?"

"그건 내가 해야할 말 같은데… 깨워줬으면 좋았을 텐데."

"별로 깨우고싶지 않았다." 

얼마간을 잠들었는지 짐작조차 가질 않는다. 그러나 해가 많이 기울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리 많은 시간을 보낸 것 같지는 않았다. 

벨레스는 제 팔 안에서 몸을 뒤척이는 에델가르트를 다시 한 번 끌어안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깊게 잠들지는 않았지만 잠깐 새 목이 잠겨있었다. 귓가에 와닿는 한숨에 에델가르트가 몸을 움츠린다. 소리없이 고개를 숙이는 작은 귓가는 붉게 물들어 달아올라 있었다.

이 익숙한 색채를 놓칠 정도로 무신경하지는 않았다. 그 붉어진 귓가를 잠시간 응시했다가, 벨레스는 의도적으로 에델가르트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낮은 숨을 뱉었다.
  
"…엘." 

"…아……."

부드럽게 몸을 덮은 팔을 통해서, 벨레스는 에델가르트의 작은 움츠림을 놓치지 않았다. 긴장으로 침을 삼키는 목덜미의 움직임과 급하게 숨을 삼켜 튀어오르는 몸짓까지. 마지막으로 관계를 가진 게 언제였더라. 무의식 중에 셈을 하면서 벨레스는 천천히 에델가르트의 뒷목에 입술을 내렸다. 건조하지만 부드러운 키스로 목덜미를 훑어내리고, 뒤따르는 숨결을 그 여린 살 위로 흩뿌린다. 

그러자 에델가르트가 고개를 들어 벨레스를 돌아봤다. 창백한 피부가 붉게 달아오른 채 흔들리는 눈으로 벨레스를 찾는다. 그 동요하는 눈빛에서 제 것과 같을 경미한 흥분을 찾아내면서, 벨레스는 기분 좋게 입술을 핥았다. 에델가르트의 눈길이 벨레스의 눈에서 입술로, 그리고 붉은 혀를 따라 옮겨붙는다. 천천히 발화하는 욕망의 형태를 찾아 둘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연인이 된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벨레스는 서로에게 걸맞는 가장 적합한 애정의 형태를 알고있었다.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이고 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교감의 가운데 벨레스의 손은 에델가르트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아 조금이라도 더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엉겨들기 시작했다. 에델가르트의 두 팔 역시 자연스레 벨레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둘은 서로를 가로막는 그 어떤 것이라도 용납하지 않을 것처럼 몸을 붙이고, 팔을 끌어안고, 다리를 맞추고, 허리를 비틀며 서로의 숨결을 열렬히 좇았다. 반쯤 짓눌러진 한숨과 거칠게 무너지는 호흡만큼이나, 생각의 여지조차 없이 입술을 맞추고 부드러운 살결을 따라 애정 어린 키스가 쏟아내렸다. 

여린 입술을 가볍게 물어 재촉하듯이 핥아내리며, 벨레스는 천천히 숨을 흘렸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로 무너진 호흡으로 신음하는 에델가르트의 턱가에 키스를 흘린다. 곧게 뻗어 흔들리는 창백한 목가를 따라 이어지는 키스를 쏟고, 꽉 틀어막힌 황제의 정복의 끝에, 경계에 걸쳐 쉼없이 오르내리는 창백한 쇄골 위에 더운 숨을 흘렸을 때 벨레스는 이제 거의 무너져가는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바라건데 그 굳게 다문 입술 너머로 감춘 열망을 들을 수 있기를, 심장 깊은 곳까지 눌러담아 울렁거리는 열락의 신음을 풀어낼 수만 있다면. 몇 번을 마주해도 감미로울 그 끝없는 정욕과 갈구를 끌어낼 수만 있다면. 심장이 아플만큼 강렬한 갈망의 앞에서, 벨레스의 달아오른 손이 황제의 옷자락을 파고들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살결을 파고들어 다급하게 그 부드러운 일부를 쓸어담았을 때, 벨레스는 저 못지 않은 기대와 열망에 찬 한숨과 신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만."

하지만 이 얼마나 냉철한 황제인지. 붉게 달아오른 살결과 거친 호흡 속에서도 마침내 에델가르트는 벨레스의 손을 붙잡았다. 에델가르트는 뒤엉킨 채 무너져내린 제 몸을 추스르고, 벨레스를 천천히 밀어내면서 자세를 바로 잡았다. 스스로 목을 가다듬고 떨리는 숨을 집어삼키며 들춰올려진 옷자락을 부여잡는다. 흥분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몸을 천천히 세우며, 제 안에 파고든 벨레스의 손을 끌어당겨 내린다. 벨레스는 마지못해 힘을 풀며 에델가르트의 불안정한 얼굴을 실망스레 쳐다보았다. 아쉬웠지만, 에델가르트가 원하지 않는 행위를 지속하고 싶지는 않았다. 벨레스는 점차 스스로를 회복해가는 에델가르트를 홀린 듯이 쳐다보며 손을 거뒀다. 시선은 마치 못 박힌 것처럼 에델가르트의 눈을 마주했는데, 그 흔들리는 자색의 눈동자 너머로 격류처럼 일렁이는 흥분과 열정이란.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의 폭류 속에서도 에델가르트는 마침내 자신을 가다듬는 데 성공했다.

"…유감이지만, 슬슬 다시 일하러 가봐야해."

"…그렇구나."

벨레스는 막 꿈에서 깬 듯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몸 속 깊은 곳과 심장 너머에서 넘실대는 열렬한 열망은 아직도 흔들리며 발버둥 치고 있었지만. 에델가르트의 특출난 절제력은 그닥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동요하는 눈동자 너머 아우성치는 욕망과 갈망에 대조하여, 단정하게 자리한 그 굳어진 표정을 보았을 때에, 그 철저한 이성에 말없이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벨레스는 그 의사를 존중해 몸을 비키고 스스로의 몸가짐을 점검했다. …비록 속에서는 아직도 심장이 뛰쳐나올 듯 덜컹이고 있었지만. 에델가르트가 빠르게 황제의 위를 되찾는 만큼이나 벨레스의 열락도 차츰 잦아들어 귀애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배신하는 것처럼, 벨레스의 손이 에델가르트의 팔을 붙잡았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무의식적으로 이뤄진 행동이었다.

"선생님?"

"......"

"오늘 정말 무슨 일이야."

에델가르트는 떨리는 눈을 깜빡이며 조용히 웃었다. 가느다랗고 긴 엷은 은색의 눈꺼풀이 힘없이 흔들리며 요동한다. 에델가르트의 천천히 내려선 손이 마침내 제 미련이 남은 팔을 잡아 떼어낼 때, 벨레스는 가벼운 낙심에 빠질 뻔 했다.

"...갑자기 투정이라니."

마치 탓하는 듯한 어조였지만 에델가르트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섞여있었다. 그 작은 웃음에 용기를 얻어 벨레스는 제 손을 붙잡은 팔을 약하게 끌어당겼다. 그러자 에델가르트는 마지 못해 끌려오는 것처럼 팔을 내주고 벨레스의 어깨 위에 두 손을 얹었다.

"…내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지."

"…그렇지는 않아."

"정말?"

벨레스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에델가르트 앞에서 돌연 그리움을 토로함으로써 서운함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조용히 그 단정한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그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선생님."

"응."

"지금 꼭 억울한 강아지같은 표정으로 날 보고 있잖아."

"내가?"

에델가르트는 결국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즐거운 웃음을 흘렸다. 세상에. 불과 조금 전의 둘 사이에서 붙어오르던 강렬한 불꽃만큼이나, 그 자연스러운 웃음은 그저 아름다웠다. 벨레스는 스스로의 경탄에 빠져 마냥 웅얼대듯 작게 입을 열었다.

"…보내기 싫어."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래."

어깨에 올라선 에델가르트의 손이 꼭 달래는 것처럼 벨레스의 볼을 덮었다. 가볍게 턱을 스치고 고개를 받치듯 움직인 장갑이 벨레스의 얼굴을 감싼다. 벨레스는 저를 감싼 에델가르트의 손등에 마주 손을 올리고, 조용히 고개를 기울여 그 손바닥에 키스했다. 위안을 구하듯 에델가르트의 손 안에 제 숨을 뱉고 코를 움직였다. 단정한 장갑 아래에 자리하고 있을 손가락 마디마디와 단단한 손등뼈 위에 코 끝을 문지른 다음, 제가 쥐어준 반지가 자리한 손가락에는 특히나 조심스러운 키스를 얹었다. 경애와, 기쁨과, 친애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더한 것보다도 큰 사랑을 담아서.

그 손 안에 얼굴을 묻으면서, 벨레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보내기 싫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벨레스는 제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에델가르트를 느낄 수 있었다. 천 너머로 전해지는 그 따뜻한 온기에 잠시 기대어 쉬었다가, 천천히 에델가르트의 눈을 올려다보았을 때, 벨레스는 들리지는 않았으나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한마디를 느낄 수 있었다. 밤하늘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빛이 쏟아져내리는 것처럼, 깊은 애정의 속삭임이 에델가르트의 눈에서 별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랑해. 

소리내어 말하지 않은 대답이었으나 이는 분명히 에델가르트에게도 닿았을 것이다. 둘은 말 없이 서로를 따라 그린 것 같은 웃음을 띄웠다.

"약속할게. 금방 돌아갈 테니까." 

"기다리는 건 별로야."

"정말이야, 선생님."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에델가르트가 다시 한 번 벨레스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는 차분히 고개를 숙여 벨레스를 응시한다. 허락을 구하듯 조용히 벨레스를 들여다보고, 고요하고 경건하게 벨레스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짧은 입맞춤과 함께 에델가르트는 희미한 웃음과 잔상과 같은 향을 남기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벨레스도 에델가르트를 붙잡지 않았다.  

"이따 봐, 나의 선생님." 

느릿하게 눈을 감으면서 속삭이는 에델가르트는 아름답고 고결한 천사와도 같았다. 꿈처럼 따스하던 손길이 옅어지고 은자수와도 같은 아름다운 머릿결마저 멀어졌지만 벨레스는 입가를 빠져나오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충분한 휴식이 되었을까. 오히려 욕망에 취해 그 짧은 휴식을 무너뜨릴 뻔까지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적어도 잠결에 취해 기억도 나지 않는 새벽에 에델가르트를 볼 일은 없겠지.  

"이따 봐, 엘."

남아있는 시간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그 모든 시간은 에델가르트를 위해 존재할 것이다. 걸음을 맞춰 나란히 걸어온 시간 이상으로 둘은 같은 길을 걸을 것이고, 앞으로 걷게 될 모든 길도 에델가르트의 옆이겠지. 언제든. 

그렇다면 조금 정도는 더 기다려 봐도 좋지 않을까.
 

 
      

 

 

- 19.09.27

Posted by 까망베르 베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