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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up - etc2018. 9. 17. 02:59

새로 이사온 집은 생각보다 깔끔하니 아름다웠다. 어차피 혼자 살 집인데 넓어서 무엇 하겠느냐는 전제 하에 잡은 집이라 빈말로도 넓다고는 부를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늑한 자신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기쁨에 슬며시 미소지으면서 다희는 휘휘 제 옷소매를 걷어붙였다. 대다수의 짐은 이미 다 건너왔고 남은 건 청소 및 가구 재배치 뿐이다. 힘찬 노동의 첫걸음을 위하여! 환기를 위해 창문을 거칠게 열어제낀 다희는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순간적으로 닥쳐들어오는 찬공기에 한차례 몸을 떨었다.

다시 닫아야되나. 짧은 갈등에 활짝 열린 창 너머만을 멍하니 쳐다보고있는데, 시야 구석에서 무언가 거뭇거뭇한 점이 아스라이 보인다. 잘못 보았나 싶어 창 밖으로 휘 고개를 내밀어보니, 창가 바깥의 좁은 틈새 사이로 웬 털뭉치 하나가 움찔움찔 몸을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들어올려보니, 제 두 손바닥 안에 가볍게 들어오는 작디 작은 고양이다. 

"...?"

찬공기를 오래 쐬었는지 안쓰러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어대는 움직임에 일단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다희는 곧바로 고양이를 제 방 안에 내려놓았다. 어딘지 모르게 단정한 짙은 갈색 털에 먼지 하나 붙지 않은 깔끔한 몸, 깨끗한 얼굴이 딱 집고양이의 뽄새다. 여즉 떨어대는 가녀린 모습에 다희는 얼른 창문을 닫아걸고 조심스레 고양이를 안아들어 제 품 안에 집어넣었다. 집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일러도 틀어놓지 않아 집안 공기 역시 서늘하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따뜻하게 해줄만한 수단이 이것 말고는 없었다. 

"많이 춥냐?"

두 팔로 고양이의 몸 전체를 꼭 껴안으면서, 낯간지러운 느낌에 다희는 낮게 웃었다. 사실 제대 이후 갓 얻은 집이니만큼 이것저것 하고싶은 일들은 많았다. 그 중엔 애완동물을 길러볼까 하는 계획도 있었다.

"너 집이 어디야, 응?"

제 연속된 질문에도 고양이는 외마디 울음도 없이 그저 바들바들 떠는 제 몸을 다희 품 안에 깊숙이 묻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고양이의 등을 제 손바닥으로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다희는 인상을 찌푸렸다. 

일단 그런 창가 구석진 곳에 고양이가 어디서 뚝 떨어져 나타날 수는 없다. 가능성 있는 건 그냥 이 고양이가 어쩌다 창 밖으로 모험을 떠났고, 바로 제 집 창가로 폴짝 점프를 해서 왔다는 것이다. 어떻게 넘어오기는 했는데 다시 돌아가지를 못해서 바들바들 떨고있었던 건 아닐까. 

고작 새끼니까 먼 거리를 이동해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옆집에서 왔나? 일단 제 겉옷으로 고양이를 꽁꽁 싸매놓고, 다희는 다시 창문을 열어 제 고개를 창 밖으로 삐죽 밖으로 내밀었다. 왼쪽 집, 창문 닫혀있음. 오른쪽 집, 창문 열려있음. 

"야. 너네 집 찾은 거 같다."

이사떡이니 뭐니 하면서 이웃집들에 저 이사왔어요, 하고 인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결국은 옆집 초인종을 누르게 생겼다. 외투 안에 쏙 들어간 고양이를 옷째로 들어올려 품 안에 넣어놓고. 결국 다희는 집에 들어선지 5분 여 만에 다시 제 신발을 찾아신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지만 벌써 옆집 문앞이다. 흠흠 하고 헛기침으로 제 목을 다듬으면서, 다희는 조심스레 초인종을 눌렀다. 띵- 동- 하는 소리가 제 귀에도 들린다. 설마 집 안에 사람이 없나 하는 불안도 잠시, 곧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린다. 

"누구세요."

"아, 저 옆집인데... 뭐야, 라시현!?"

그리고 들려온 젊은 여자의 목소리에 일단 한 번 놀라고, 제 앞에 나타난 사람의 익숙한 얼굴에 다시 한 번 놀라면서 다희는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뭐야 대체 뭐야. 그냥 차분하게 안녕하세요 저 옆집 사람인데 혹시 이 고양이가 댁네 고양이가 맞는지요, 하고 물어보기만 하려고 했는데. 왜 라시현이 여기서 나와?

"...류다희?"

관심없고 무표정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던 여자의 눈빛이 곧 깨달음, 그리고 놀람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직접적으로 맞딱뜨리면서, 다희는 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냥 이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얘가 왜 여기서 나와? 제대하고 몇달 보지 않은 사이 전부 잊었었던 것만 같았던 기억이 물밀듯이 쏟아져내려온다. 뺨 맞던 기억, 얼차려 받던 기억, 욕 들어먹었던 기억, 되도않는 것으로 저를 갈구며 못 살게 굴었었던 기억, 매번 부딪치며 원수처럼 으르렁 댔었던 안 좋은 기억, 그러나 결국 열외 타고 말미엔 서로 말도 놓고 그럭저럭 데면데면하게 지내다 먼저 보냈던 기억. 사실 라시현이 제대하고 나서부턴 군생활도 영 밋밋하고 그저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무료하기만 했었다. 

순간적으로 찾아드는 제 이 감정이 반가움인지, 미운 정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아는 사람을 봤다는 놀라움인지 모르겠어서 다희는 그저 멍하니 시현의 얼굴만을 쳐다보았다. 그건 시현 역시 마찬가지라 둘은 별다른 말 없이 그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시현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너, 우리집은 어떻게 안 거니?"

"나 어제 이사왔는데."

"옆집? 그게 너라고?"

나긋하게 되묻는 물음이 딱 그때 그 시절, 수경 시절의 라시현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다희는 소름이 돋는 기분에 조용히 수긍하면서 제 품 안에 있던 외투 속 고양이를 슥 들어올렸다.

"니 고양이냐?"

"...걔가 왜 너한테 있니?" 

그러게, 나도 모르겠다. 어정쩡하게 서서 고양이만 슥 들어올리고 있자니, 제 등을 훑고가는 찬바람에 뒤늦게 추운 감이 들어서 다희는 부스스 몸을 떨었다. 고작 옆집 가는데 다른 겉옷 찾아입기도 귀찮아서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왔더니만 생각보다 날씨가 추웠다.

"...일단 들어와."

"뭐?"

고작 옆집인데 내가 뭣하러? 어차피 고양이 주인인 거 확인하면 고양이만 휙 던져주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다희가 주저하며 되묻자, 시현이 곧 조용한 눈빛으로 차분히 다희를 응시한다.

"류다희. 들어와."

어떤 말을 더 할까. 문 안에서 저가 들어오기 쉽게끔 자리를 만들며 비켜주는 시현의 모습에 결국 다희는 뒷말없이 조용히 집 안으로 제 몸을 들였다. 들어오라는 말에 자동반사적으로 들어와버린 것이 꼭 한창 때의 군인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제대한지 몇달이 지나서 이제 끝났다 하고 있었는데, 군복무 시절 같은 소대 선임을 만나니까 몸이 마치 현역 때처럼 움직여버렸다. 라시현이 그때처럼 저런 얼굴을 하면 다희는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여긴 사회야 류다희, 군대가 아니라고!'

소리없이 한탄하면서 다희는 조심스레 고양이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같은 오피스텔이라 시현의 집 구조는 제 집이랑 별 다를 바가 없다. 가구배치나 세세한 인테리어는 조금 달랐지만 그런 것에 눈이 가지는 않았다. 제 뒤에 라시현이 있는데 그런 것에 신경이 갈 리가 없었다.

"앉아."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시키는 대로 쇼파에 가서 앉고나니 그제야 집 안이 한 눈에 들어왔다. 고양이 집, 고양이 장난감 몇 개, 꺼져있는 티비 한대와 깔끔하니 새하얀 싱글침대. 조금 전까지 사람이 앉아있었던 듯 엇나가있는 의자와 테이블 위 홀로 켜져있는 노트북, 작게 웅웅대는 세탁기와 작은 냉장고, 따뜻한 바닥 아래에서 제 몸을 덮는 큰 옷을 빠져나오기 위해 조용히 바둥대는 고양이 한 마리와, 라시현. 

언제 들고왔는지 양 손에 따뜻한 김이 나는 머그잔을 든 시현은 곧 한잔을 다희에게 내밀었다. 자연스레 받아들고 한 모금 머금어보니 향 좋은 커피다. 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답답하고 막막하고 조금 아련한 것도 같고 반가우면서도 그에 못지 않게 어색해서, 다희는 그냥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는 기분으로 되는대로 입을 열었다.

"그, 고양이가 우리집 창 밖에서 떨고있더라고." 

"그래?"

그래? 그래. 어떡하라는 거지. 대화가 이어지지는 않는데 무슨 말은 해야할 것 같고 또 그러면서도 어떤 말을 해야할지 전혀 모르겠어서, 결국 다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제 손에 들린 커피나 홀짝이면서 시현을 보니, 저 멀리 떨어진 의자에 앉아서 홀로 고고하니 턱을 괴고 있는 것이 마치 전혀 관심없는 듯한 눈치였다. 

"제대한 지 두달은 됐니?"

커피를 홀짝이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시현이 다희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류다희?"

다른 생각을 하고있으니 고개를 끄덕여도 보지를 못하지. 속으로 툴툴 대면서도 다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치 바톤을 넘겨받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너, 너 고양이도 길렀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지만 사실 오랜만에 다시 만나고 얼마 안 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이기도 했다. 라시현과 고양이는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잘 어울리는 면이 있었다. 도도하고 얌전하고 나긋한 것 같으면서도 까칠할 땐 한없이 까칠하고, 날렵하고 사나우면서도 영악한 것이 시현은 딱 고양이 꼴이다. 속으로 둘이 딱 맞는다고 박수를 치면서 다희는 슬쩍 시현과 고양이를 번갈아보았다. 

"학교는?"

질문에 질문으로 되돌려주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제 질문이 씹힌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시현인 걸. 그냥 제 멋대로 저 좋을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홀로 납득하면서 다희는 그냥 어물쩍 대답을 얼버무렸다. 어차피 아직 복학하지도 않은데다 솔직히 복학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마음속으로 갈등도 일었던 탓이다. 군 제대 후 누구나 느끼는 일종의 막막함과 현실에 대한 유리감을 아직 벗어내지 못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 관한 질문을 들으면 딱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 얘기를 꺼내고 싶지도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적응 안되지?"

그래도 조금이나마 더 먼저 사제 공기를 맡았다고, 니 마음 다 이해한다는 식으로 툭 내던져지는 시현의 말에 다희는 그저 말없이 제 몸을 움츠렸다. 솔직히 그랬다. 시현이나 다희나 사회에 서면 그냥 둘 다 비슷한 입장의 비슷한 사람이겠지만, 언제나 라시현은 류다희보다 앞서나가고 있었다. 시현은 몇달 먼저 들어와 다희를 가르치는 선임이었고, 몇달 먼저 제대해 더욱 빨리 적응한 사회인이며 또 지금은 갓 제대한 의경인 다희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선배였다.

"류다희."

"응?"

"너, 술은 잘하니?"

"...뭐?"





*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둘은 마치 약속한 듯이 나란히 일어났고, 다희는 시현의 등 뒤만 쫓아다니면서 시현이 안내하는 술집으로 쏙 들어갔다. 제대하고 한동안 이 친구 저 친구 다 만나가며 앞뒤 안보고 술만 마시고 다닌 탓에 솔직히 술에 자신 있었기도 했고. 그래서 이 얘기 저 얘기, 의경 시절 얘기와 사회 이야기, 고양이 얘기니 뭐니 별 자잘하고 기억도 안 나는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공감하고 웃고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다. 제 집까지 제대로 걸어오지도 못해 비틀비틀 대고 길바닥에 드러누울 뻔 했다가 간신히 시현의 도움으로 오피스텔까지 왔던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제 집 앞에서 도어락을 눌러대다가 하도 정신이 없어서 엉망진창으로 틀려대고, 결국 문 앞에 머리를 처박아가며 열려라 참깨를 외치다가 시현에게 붙잡혀 집으로 끌려왔던 것까지.

그 모든 기억들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제 옆에 누워있는 라시현이 증명하고 있었다. 다희는 깨질듯이 아파오는 두통을 감내하고 부끄러움과 쪽팔림, 당황과 수치 등으로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가운데에서도 차근차근 제 기억을 되짚어갔다. 마지막 기억은 시현의 손에 의해 새하얀 침대 위로 눕혀지던 기억이다. 분명 저 혼자 드러누웠고, 편안한 느낌에 거의 기절하듯 잠들었던 것이 기억나는데 문제는 어째서 라시현이 옆에 누워있냐는 것이다. 더군다나 다희는 시현의 오른팔을 마치 베개라도 되듯 꼭 끌어안고 누워있었다. 지금도 제 품 안에 얌전히 안겨있는 이 마른 팔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은 혹시 그 반동으로 라시현이 깰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으으..."

전후좌우 구분도 안 가고 그냥 머릿속을 믹서기로 휘저어놓은 듯이 정신머리라고는 하나 없고 복잡하기만 한 상황이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다희는 그저 본능과도 같이 최대한 큰 소리 없이, 큰 움직임 없이 시현의 옆에 누워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고자 했다.

"아, 씨발..."

강제 얼음이 되어 누워있는 상태로 기억을 차분히 되짚어보니 일단 그것 외에는 딱히 실수한 것이 없는 듯했다. 토하지도 않았고, 주정부리다 라시현에게 욕설을 내뱉지도 않았다. 너 때문에 그때 존나게 힘들었었다라고 우물우물대며 말한 것도 같지만. 아, 미쳤구나 류다희. 무슨 정신머리로 이렇게 죽자고 술을 마셨니. 제 핸드폰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아서 시간을 아는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해가 뜬 것 같지는 않으니 그렇다면 아직 한밤중이거나 새벽일 것이다. 그러니 시현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것도 요원한 일이다. 

일단 팔이라도 빼내볼까. 군 시절 내내 견원지간 처럼 지내던 둘이다. 아무리 지금 사회에 나가 둘 사이 입장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그 라시현의 팔을 꼭 끌어안고 잠드는 꼴만은 피하고 싶었다. 꼬물락대면서 먼저 제 손가락 깍지를 풀었다. 슬슬슬 천천히 제가 부여잡은 힘을 풀어낸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소리없이 팔을 빼낸다. 한참 후,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다희는 제 두 팔을 시현에게서 완전히 떼어낼 수 있었다. 팔을 빼내기는 했지만 다희의 바로 가슴 위에 시현의 팔이 올려져있기 때문에, 다희는 이번엔 시현의 팔을 천천히 밀어내기로 했다. 부드럽게 반으로 접어서 시현에게 되돌려주면 아주 완벽한 탈출 그림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소리소문없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다희는 먼저 시현의 팔을 살포시 붙잡았다. 깡말라 살집 하나 없는 팔이 다희의 손 안에 쏙 들어왔다. 왜 이렇게 말랐대. 제대한 지 좀 되었으니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술도 많이 마시면서 여기저기서 살을 좀 찌웠을 법도 한데, 오히려 라시현은 제대 전보다도 조금 마른 것 같았다. 쯧. 제 몸관리 하나 못하면서 어찌 나라를 지킨다고. 이 깡마름이 불편하고도 조금 안쓰러워서, 다희는 슬쩍 고개를 돌려 누워있는 시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보고말았다. 재미있는 것을 본다는 듯 입꼬리가 올라간 부드러운 시현의 얼굴을. 놀라울 정도로 무방비한, 경계나 적의 따위 하나없는 부드러운 표정이어서 처음에 다희는 시현이 저를 보고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라시현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나, 하고 놀랐을 뿐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다희는 곧 제 가슴 위에 올라앉은 이 팔의 주인공, 제가 그렇게 열심히 치우려 고군분투하던 팔의 주인인 라시현이 저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간 다희가 그 팔을 치우기 위해 했던 모든 과정들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웃음기 담긴 입꼬리가 그 모든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왜, 더 해보지?"

죽고싶다.

보나마나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올랐을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다희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비명 지르며 발버둥칠 수만 있다면 분명 그리 했을 것이다. 다만 시현의 눈빛 앞에선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가소롭다는 듯, 그 발악을 지켜보겠다는 듯 비웃는 낯빛으로 내려보는 눈빛도 그러했지만. 이런 식으로 부드럽게 저를 바라보는 눈빛 앞에서도 결국 저가 무기력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류다희."

"......"

"류다희. 다희야." 

"...왜."

불러놓고 별 말 하지 않는 건 똑같았다. 잘하자, 라는 말이 귓가를 울린다. 라시현은 항상 그랬다. 먼저 이름을 불러놓고, 고저 없이 평탄한 낮은 목소리로 으스대지 않고 그저 한마디만 하고는 했다. 잘하자, 혹은 기억해둘게. 그렇게 오버랩되는 모습과 함께, 시현이 조용히 제 입을 열었다.

"얌전히 자."

발버둥 치지 말고. 덧붙여 흘러나오는 말에 결국 다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발버둥 치는 것도 멈춘 채 얌전히 천장을 쳐다보며 눈을 감는데, 제 가슴 위에 나앉은 팔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슬쩍 고개를 돌리면서 다시 말을 붙인다.

"저기, 팔 좀 치울게."

제 몸 위에 올라앉은 팔 하나 치우질 못하고 결국 슬슬 허락을 구하는 꼴이라니. 왜 라시현 앞에만 서면 이렇게 무기력해지느냐고 다희는 스스로를 구박하며 시현의 팔을 살짝 들어 내려놓았다. 

"...팔 달라고 아우성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러니?"

"뭐! 내가, 내가 그랬다고?"

"..."

그럴 리가 없다고 사실을 부인하려고 해도 찔리는 것이 있어서, 결국 다희는 제 손으로 얼굴을 푹 덮어버리며 으아아 한숨을 내뱉었다. 저 라시현이 먼저 제 몸 위에 팔을 올릴 일은 없을 것이니 결국 답은 그것 밖에 없다. 왜, 하필. 라시현이냐고. 어째서 이렇게 되었냐고 스스로에게 되물어봐도 답은 돌아오지를 않는다. 

좋아, 류다희. 잠도 다 깼으니 집으로 간다고 하자. 집으로 간다고 해버리자. 그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 뿐이라 결국 다희는 헐레벌떡 침대를 벗어났다. 그리고 바닥에 발을 내려놓고 한 발자국 떼자마자, 어지러움이 엄습한다. 숙취란 것이 언제나 그렇듯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두통은 사그라들었어도 어지럼증은 그대로였던 것이다.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엉거주춤 일어난 바람에 결국 다희는 넘어지듯 침대 위로 나동그라졌다. 바닥에 쓰러진 것이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야하겠지만, 아무래도 다희에게 다이렉트로 깔려버린 시현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윽...... 하, 류다희..."

고통어린 신음 속에 원망의 기운이 담겨있다. 다희는 시현의 안색을 살피고 미안하다 말하며 결국 다시 제 몸가짐을 가지런히 한 채로 침대에 얌전히 누웠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아파서 찡그린 시현의 낯빛이나 잔뜩 낮게 깔려나오는 신음소리와 자그맣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야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희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솔직히 그랬다. 시현은 집 안이라고 부드럽고 여린 몸이 다 드러나는 편한 골지 티셔츠를 입은 듯 했다. 그 바람에 신음하며 잠깐 몸을 비트는 사이에 그 여성스럽고 가냘픈 목이나 어깨선 등 전체적인 실루엣이 한 번에 다희의 눈에 들어왔다. 새삼스레 라시현이 마르고 얇고 가녀린, 정말이지 연약해보이는 체형의 소유자라는 것을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류다희, 너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니. 결국 다희는 숙취가 제 눈까지 미치게 만들었다고 고개를 뒤흔들었다. 그리고는 아까와 달리 천천히 조심스럽게 침대 밖을 나섰다. 침대를 등진 채 바닥에 조심스레 누워 아무 것도 못 봤다고 아무 것도 못 들었다고 주문을 걸며 질끈 눈을 감는다. 그런 제 등을 쳐다보는 시현의 시선이 찌르듯이 느껴졌지만, 다희는 결코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심호흡 하며, 차분히 말을 정리한다.

"여기서 잘게."

"바닥에서 잔다는 거니?"

"..."

"가지가지 한다, 류다희."

한숨과 함께 시현이 돌아눕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하고 침을 꼴깍 삼키면서 결국 다희는 어거지로 눈을 감았다. 다희는 이제 제 발 밑에서 야옹, 하고 우는 작은 고양이와 함께 잠들듯 잠들지 않는 긴 밤을 지새우게 되는 것이었다. 이웃집 사람이 라시현이라는 이 대단한 우연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면서, 부디 이 순간이 꿈이기를. 그러나 또 마음 한구석으로는 꿈이 아니기를 바라는 제가 있었다. 

모르겠다. 미운 것도 같고, 좋은 것도 같고. 하지만 사실 그런 감정보다는 그래, 그것이 제일 컸다. 다희는 시현이 반가웠다. 군대라는 특별한 공간 속에서 같은 시간과 경험을 공유한 사람을 사회에서 만나는 것은 굉장히 미묘하면서도 기쁜 만남이었다. 바로 오늘 같이 술잔을 나누면서 다희는 새삼스레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의경 라시현과 사회인 라시현은 다르면서도 같은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다름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면의 다름이다. 각박하고 모진 군대와는 달리 인간 됨됨이가 드러나는 사회, 개인적인 술자리에서의 교류는 그간 다희가 품고있었던 시현에 대한 시선을 무르게 만들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솔직한 제 기쁨과 기분을 음미하면서, 다희는 이 우연한 만남이 나쁘지는 않다고 조용히 시인했다. 잠시 뒤 침대 위에서 들썩이는 움직임과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얼마 안가 다희의 몸 위로 부드러운 천 이불이 내려앉는다.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어주는 시현의 모습이 보지 않아도 선하다. 라시현에게서 결코 기대해본 적 없는 이 친절과 매너에 소름이 돋는 것 같으면서도 그것이 기쁘게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다희가 시현에게서 어떠한 인간적인 선을 기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군대 내에서는 보여주지 않았던 라시현의 또 다른 면모 말이다. 

제 몸을 덮는 이불을 끌어안으면서 다희는 조용히 생각했다. 라시현은 어쩌면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전처럼 질색하고 기피할 것이 아니라 어쩌면 한두 번쯤은 더 만나고 이야기해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이 곳은, 군대가 아니니까. 

오늘 이 순간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이 다가가기엔 이미 다희 저가 상당히 취한 상태이고 창피한 감도 없잖아 있었기에 결국 그 새로운 마음을 내일의 자신에게로 토스하면서, 다희는 차분히 눈을 깜빡였다.













<설정> 

1. 류다희 얼굴이 라시현 취향 핵직격임. 라시현은 그래서 의경 생활 시작하고 다희가 후임으로 들어왔을 때 솔직히 개깜짝 놀람.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해서 잘해볼까 하는 생각도 없잖아 있었는데 의경 생활이 워낙 욕나오고 결국 성격 배리면서 다희가 막 동기 챙기고 민지선한테 뽈뽈 대며 꼬리 흔드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해서 사이 틀어지고 괴롭히기 시작한 것. 

2. 근데 제대하고 류다희 보니까 존나 말이 안 나옴. 일단 그 전에도 생긴 게 존나 취향이었는데 사회 나와서 가꾸기 시작한 다희라 안 그래도 이쁜 얼굴인데 외모가 아주 물 오른데다가 사복 차림에 뻑감. 고양이 안고 추워서 바들바들 떠는 것도 보호본능 자극해서 완전 마음에 듬.

3. 술 주는대로 잘 마시길래 잘 하는 줄 알고 계속 달림. 사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어느 정도 있기는 했는데 그래도 그냥 취한 게 보고싶었을 뿐이지 어떻게 해볼 생각까지는 없었음. 근데 애가 막 자기 집 문 앞에 머리 박고 문 열어주세요 하고 기도하고 있질 않나 결국 밖에서 그러는 게 불쌍해서 그냥 집에 데리고들어옴. 그리고 침대에 눕혀놓고 그냥 자긴 바닥에서 자려고 하는데 다희가 취해서 시현이 붙잡고 안 놔주질 않나 결국 못 이기는 척 침대에 같이 누웠음. 팔은 진짜로 다희가 잡고 안 놔준 거. 나중에 잠 깬 다희가 팔 빼내려고 낑낑대는 모습이 귀여워서 살짝 웃고있었음.

4. (미래) 류다희는 어차피 옆집이겠다 인연도 있겠다 라시현이랑 친해지고 더 알아가면서 의경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그 차이를 곱씹으며 시현이를 관찰하면서 재인식의 과정을 거치다가 결국 빠져버린다고 합니다. 시현이는 이미 한참 전부터 다희한테 호감이 있는 상태였고 결국 둘이 썸타다 사귈 듯.

5. 나중에 다희는 시현이네 고양이한테 우리집 창문으로 넘어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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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망베르 베베
Backup - etc2018. 9. 17. 02:57

미친년. 샹년. 개년. 시발년. 어떤 단어로 표현해도 부족할 것만 같은 여자가 있다. 영악하고 이기적이고 까칠하고 복잡해서, 감히 그 싸가지없음을 재단하기도 힘든.

"씨발!"

존나 까탈스럽기가 고슴도치보다 더한 년. 담배 필터를 씹어물면서 다희는 죄없는 가슴팍만 퍽퍽 내리쳤다. 속 안에 응어리 진 것이 오갈데없이 가득차 손발까지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은 터질듯이 박동해 제대로 호흡하기도 힘들었다. 분노로 부글부글 끓는 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라이터를 딸각이면서. 다희는 조용히 욕설을 내뱉었다. 별 것도 아닌 일이었다. 명령이 꼬였다. 두 상사가 각기 같은 일을 지시하면서 결과적으로 같은 일을 다른 방식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둘 모두 그들만의 방식이 있는 사람이라 어쩔 방도가 없었다. 각자의 방식에 맞춰 따로 진행하느라 진도가 더뎌졌고, 결과적으로 시간 내에 맞추지 못 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그 시발. 후. 라시현이 그걸 발견했다. 대놓고 다희의 능력과 일처리를 비꼬면서, 다희가 마무리 한 서류를 쓰레기처럼 내던진 것이다. 

'다희 씨 능력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 유두리 없이 그걸 곧이곧대로 따라들어서 실행해요? 틀린 것 같으면 알아서 제 선에서 수정하는 게 정답 아닌가?'

여기가 군대인 줄 알아요? 하고 비웃던 라시현. 갑갑하게 채워진 블라우스 단추를 거칠게 풀어내면서, 다희는 제 손 안에서 우그러진 담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장초고 뭐고 보이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칙칙 거리며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낼 뿐 불이라고는 올라오지 않는 라이터도 마찬가지였다. 손에 들린 모든 걸 바닥에 내던져버리고 가슴께를 쥐어뜯었다. 숨이 막히고 홧홧대는 열이 차올라오는 것이,

"홧병났니?"

"그래! 홧병 씨발 홧병!"

버럭 반사적으로 소리를 내질렀다가. 다희는 곧 얼음처럼 굳어졌다. 

"어, 저... 라시현 선배님?"

"왜? 류다희."

둘만 있다고 바로 말을 놓는 그 변화무쌍한 모습에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말을 잇지 못하겠다. 다희는 그저 낭패한 제 기색을 숨기기 위해 헛기침을 하면서 말없이 손바닥을 털었다. 손가락에 묻어난 담배 찌꺼기를 훌훌 털어내면서 어색하게 서있자, 군시절과 거의 변한 것이 없는 시현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불러놓고 제사 지내니?"

"...아뇨. 아닙니다."

"왜 그렇게 굳어있어?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다니?"

"..."

어떻게. 라시현을 군대 안에서도 모자라 사회에서까지 마주칠 수가 있을까. 어긋나도 잔뜩 어긋난 제 운명을 원망하면서, 다희는 입술을 짓씹었다. 군시절 내내 저와 반목하며 부딪히더니만 결국은 직장 상사로 다시 나타나 이제 새로이 저를 괴롭힌다.

"귀신 본 것처럼 서있지 말고 담배나 한대 줘볼래?"

"금연하신 거 아니셨습니까...?"

"누구 얼굴을 보니 담배가 다시 말리네. 안 좋은 기억도 조금 떠오르고."

전혀 힐난하는 기색없이 평탄한 어조로 중얼이면서, 시현이 냉막한 눈으로 다희를 응시한다. 그게 꼭 마치 다시 군시절로 되돌아간 것만 같아서 다희는 심란한 기분이었다.

"왜 그런 눈이니?"

니가 나보다 잘 알겠지. 마음속으로 중얼이면서 결국 다희는 시현에게 제 담배를 내밀었다. 바닥에 내던진 라이터도 주워들고와서 다시 불을 붙여올린다. 그런 제 행동을 지켜보는 시현의 눈빛이 마치 얼음장같이 차갑고 사무적이어서 다희는 찬찬히 소름이 돋는 듯해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전과 같았다. 소리없이 들이킨 연기를 제 앞에 대고 내뿜으면서, 시현은 차분하게 다희의 뺨에 제 한 손을 올렸다. 더 이상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 손길은 턱을 타고 목으로 내려가 잔뜩 풀린 블라우스 안의 다희의 하얀 살 위로 내려앉는다. 그 손길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서있는 채로, 다희는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짜릿한 긴장과 오한을 다스리기 위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후... 잘하자, 다희야."

흐릿하게 내려앉은 눈빛으로 다희의 쇄골께를 쓰다듬으면서, 시현이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1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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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망베르 베베
2018. 9. 17.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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