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담2020. 6. 30. 19:46

후기

 

 

 

*추상적으로 표현하나 매운 맛의 스포 있음 주의!

 

 

 

 

간단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게임이지만 어떻게든 이해하려는 시도 하에 머릿속으로 뱅뱅 돌던 생각을 정리해보기로 한다.

 

대전제로, 애비게일은 조엘의 대척점에 선 상징적인 캐릭터다. 조엘이 1편에서 가졌던 특성들을 그대로 가져와 반전시켜 만든 캐릭터라고 생각하면 어떠한가? 1편의 조엘은 삶의 별다른 목적도 동기도 없이 그저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나, 엘리라는 소녀를 만나 잃어버린 부성애와 가족애를 꽃 피움으로서 한 번 손에서 놓치고 말았던 가족을 향한 사랑을 되찾는다. 피는 섞이지 않은 남일지언정 조엘이 엘리를 대하는 태도는 말 그대로 딸아이를 향한 부성애 그 자체다.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긴 여행 끝에서 또 다른 삶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삶이 진정 아름다운 삶인가? 이게 바로 생각해볼 만한 요소가 아니던가. 조엘이 엘리를 살리기 위해 죽였던 수많은 사람들, 그 선택 끝에 사라져버린 세상의 희망을 생각해보면 조엘의 선택은 결코 올바르고 훌륭한 선택이 아니었다. 두 말 하기가 입 아플 정도로, 주관적 관념을 벗어나 객관적, 거시적인 사회적 통념상으로 도저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으로 조엘은 삶을 얻는다. 가치를 찾는다.

 

 

그렇다면 엘리는?

그 선택은 엘리의 삶과 생명의 근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의 어디에도 엘리의 의지는 반영되지 못 했다. 제 자신의 온연한 가치를 남에 손에 의해 결정지어지고 만 아이가 그 선택에 어찌 만족할 수 있을지? 때문에 엘리는 2편 내내 고민하며 제 삶의 가치를 찾기 시작하는 거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저울질 끝에 본인의 생명과 온 인류의 미래가 결정 됐다. 이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면 엘리가 이리도 고뇌할 이유가 없다.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기에 엘리는 끝없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는 거다. 내가 선택할 나의 정당한 권리를 앗아갔으므로 엘리가 조엘에게 분노하는 것도 결과적으로 합당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엘리는 이 분을 참지 못하고 조엘에게 역정을 드러냄으로써 관계를 파탄내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오랜 고민 끝에 조엘의 진심을 이해하기로 결심한다. 다시 그 순간을 반복한다 해도 제 선택이 번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조엘의 말을 듣는 순간 엘리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제게 남은 유일한 가족은 이제 정말 조엘 한 사람 뿐이며, 조엘이 저를 어찌나 중히 여기고 있는지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었으리라. 빼앗긴 제 가치에 여즉 분노하면서도 결국은 조엘의 진심을 이해해보리라 결심한다. 제 평생의 가치를 앗아간 너무도 이기적인, 그러나 또한 동시에 제게만은 그 누구보다 헌신적인 한 사람을 제대로 마주하기로 선택한 거다.

그리고 그 긴 고뇌와 갈등 끝에 드디어 이해해보려 한 이를 뜻하지 않게 잃는다. 다시 한 번 빼앗기고 마는 거다. 용서하고 이해해보기로 드디어 작정하고 큰 결심 끝에 마주했는데, 전혀 엉뚱한 타인에게 또 다시 스스로 받아들인 다른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온연한 이해자이자 저의 유일한 가족, 선한 보호자이며 동시에 이기적인 독재자이기도 한 제 삶의 너무나 큰 단 한 사람을 상실한다. 여기서 갈 곳 잃은 분노가 폭발한다. 집착에 가까운 복수는 결국 엘리의 방황이 찾아낸 유일한 가치의 대안이자 목표점으로 변질된다. 엘리가 조엘에게 느끼고 있던 부채감과 가족애와 증오는 갈 곳 잃은 채 서로 뒤섞여 단 하나의 상으로 남는다. 그렇게 엘리는 발산할 곳을 잃은 감정을 모두 갈취자에게로 돌린다.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다른 목표에 눈을 돌림으로써 모든 것을 집중한다. 스토리 내내 엘리가 보이는 순수한 복수심은 도 넘은 집착이 되어 불길처럼 번진다. 어찌 할 바 없이 단 하나에 몰두해 자신을 지우고 상념을 잊기로 선택해 스스로 맹인이 되어 광견처럼 행세한다.

 

제시와의 의견충돌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것처럼, 복수라는 목표에 사로잡혀 일순 토미마저도 외면한다. 득보다 실이 많은 길에 자신을 내던진다.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이외엔 스스로 할 수 있는 선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애비라는 인물의 상징성을 생각해야 한다. 애비는 조엘의 상징을 띄게끔 철저하게 조형된 캐릭터다. 조엘이 가진 부성애와 가족애를 그대로 유지하고, 엘리와 유사한 어린 소년을 피보호자로 동참한 채 제 목숨과 생명을 모두 던져 아이를 지키는데 삶을 헌신한다. 오로지 상징성만을 위해 조형된 설정의 몰개연성이 여기서 발생한다. 조엘은 이전 사라를 잃음으로 상실한 딸이라는 존재를 엘리를 통해 되찾는다. 여기서 조엘이 회복한 가치와 가족애는 결과적으로 잃었던 것을 다시 찾는 완벽한 흐름을 탄다.

 

애비 역시 조엘의 손에 의해 아버지를 잃는다. 조엘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잃기는 하나 스토리 내내 애비가 보여주는 모습은 조엘과 같은 타당하고 정당한 회복성을 띄지는 않는다. 아버지라는 보호자와 어린 소년이라는 피보호자는 가족이라는 개념의 울타리 안에는 들지언정 동일성 있는 완연한 대체재로 성립하기는 어렵다. 가족을 향한 애상으로 이해하려 해봐도, 이 낯선 어린 아이에 대한 애비의 과도한 헌신은 다소 의아할 정도다. 단순히 구명에 보은하고자 몸을 던지는 것은 처음 한두 번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애비는 그 위험한 병원에 생사를 뒤로 하고 달려들 이유가 없는 사람이며, 적의 소굴인 세라파이트의 섬에 잠입할 이유는 더더욱이 없는 인물이다. 이는 오로지 애비가 조엘의 상징성을 띄기 위해 조형된 캐릭터이기에 발생하는 특이점이다. 애비 역시 엘리와 동일하게 복수라는 가치에 매몰된 삶을 살아왔다. 복수를 완수한 이로 목표점을 상실해 방황하던 차에 다른 가치가 눈에 들어와 이에 집중하게 되었다는 해석도 물론 가능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애비의 과도한 희생정신은 너무도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다. 조엘이 엘리를 통해 회복하는 가족애는 어디까지나 잃어버린 것과 너무도 유사한 존재를 되찾았다는 조건의 유사성 하에 성립한다. 이는 특수한 경우로 애비와 래브의 경우는 분명히 다르다. 나는 이걸 단순히 애비가 조엘과 비슷한 조건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보이는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해석했다.

 

여하간 애비가 조엘의 상징성을 띈 인물이라는 전제 하에 모든 것을 다시 바라보도록 하자. 엘리가 마지막 순간에 애비의 목을 조르며 조엘을 떠올린 것. 결과적으로 애비가 조엘을 상징하게끔 조형된 인물이라 그렇다. 엘리는 평생을 가도 조엘과 애비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애비의 목을 조르는 순간 엘리는 조엘과의 마지막 대화를 회상한다. 한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포기하고 미워하기로 한 이에게 스스로 내뱉었던 대답을 생각한다. “용서할 수는 없지만, 이해해보려 노력은 할게요.” 이 대답이 결국 엘리가 조엘에게 남긴 유예다. 지쳐 쓰러져가는 와중에도 다른 것은 안두에 두지도 않고 오로지 래브만을 돌보는 애비의 모습에서 엘리는 무의식적으로 조엘을 연류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때문에 엘리는 스스로의 손으로 애비를 죽이지 못하는 거다. ‘조젤을 용서할 수 없으나 이해해보자 결정했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수용하고 인정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동일한 상징성을 띈 애비도 결국 마무리 짓지 못하는 거다. 애비의 존재를 수용하기로 결정하고 만 거다. 복수라는 일념과 상으로 맺힌 감정들은 아직도 이를 대체할 마땅한 가치를 찾지 못했다. 반복되는 자기의심과 죄책감과, 갚을 곳 없는 부채감들은 여전히 엘리의 안에 남아있다. 그러나 엘리는 애비의 존재를 유예함으로써 이제 진정 스스로의 삶의 가치를 찾으러 떠날 수 있게 된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공허함이 아니라, 다른 것을 채울 수 있는 공실을 가진 채로 일어선다. 스스로를 비우게 된다. 디나가 떠나간 농장을 뒤로 한 채 홀로 남아 다시 길을 떠나는 발걸음이 다소 쓸쓸해 보이고 외로워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이 비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워냄은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게 없어 무력하게 존재하는 공허함이 아니다. 엘리 스스로 다른 가치를 찾아 이를 담기 위해 남겨둔 여백이다. 때문에 이 여백이 다소 외로워 보이기는 할지언정 결코 슬프거나 암담하지는 않다. 엘리가 노력함에 따라, 다른 중한 가치로 얼마든 다시 채워질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1 이후로 엘리의 모든 곳에는 조엘의 상이 남아있다. 엘리에게서 조엘은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와 가치로서 성립한다. 그러나 마침내 파트 2에서 애비를 놓아주고 조엘의 상과 그의 존재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엘리는 마침내 정말 완전한 한 사람으로서 오롯이 서게 된다. 무언가 들어설 공간과 여백을 지닌 채 온전한 존재로서 스스로 발걸음을 한다. 엘리는 분명 또 다른 방황을 할 테지만, 이 방황의 끝에서 찾아내는 삶은 이제 진정 완연한 가치를 가진 스스로의 생이 될 것이다. 따라서 파트 2에서 엘리가 가진 주제는 단순한 복수와 증오뿐만 아니라, 상처 많은 아이의 처연한 성장과 결연한 독립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Posted by 까망베르 베베
2020. 3. 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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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10.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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