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26건

  1. 2018.09.17 (이영싫) 메두다나
  2. 2018.09.17 (뷰군) 시현다희 - 헤프닝 2
  3. 2018.09.17 (뷰군) 시현다희 - 오피스
  4. 2018.09.17 45 & 9 & 416 - 3P
  5. 2018.09.17 로스타 - 관계의 재정의
  6. 2018.09.17 엠포스타 - 단절
Backup - etc2018. 9. 17. 02:59

큰일났다. 무너지는 건물을 피해 도망나오면서, 메두사는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느닷없는 붕괴 조짐에 설마설마 하는 생각은 들었다만. 언제나 설마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법이었다. 유일한 입구를 통해 달려나온 메두사는 곧 제 등 뒤로 들려오는 끔찍하고 우직한 우레소리와 온몸을 떨게 만드는 큰 진동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 온전한 건물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믿지 못할만큼 처참한 모습으로, 폭삭 내려앉은 돌더미들은 저들끼리 우수수 쏟아져내리며 메두사의 뒤통수를 두드리고 있었다.


"질긴 것들. 아예 건물에 묻혀 뒈져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혼비백산해 도망나온 메두사들을 맞은 건 나이프의 영원한 적수인 스푼의 히어로들이었다. 제 앞을 딱 막고 선 히어로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사나운 눈으로 당장에라도 달려들듯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낭패다. 명백한 핀치다. 하나같이 얕볼 수 없는 쟁쟁한 히어로들. 단단히 각오하고 나왔네. 내심 혀를 차면서도 메두사는 히어로들 가운데서 유독 빛나는 얼굴, 다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다나! 역시 너였구나! 친절한 환영 고마워~"


안 그래도 무서운 눈이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이 사납게 일그러진다. 즉각적인 반응에 만족하는 찰나, 다나가 이를 갈며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의식적으로 화를 가라앉히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다만 눈빛은 전혀 가라앉지 않고 번뜩이는 것이 의도대로 잘 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다나가 눈치채지 못하게 양 쪽의 전력을 비교해봤지만 역시나 승산은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모양인지 모르겠지만 자신들이 이 곳에 올 것을 깨닫고 진작부터 포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메두사가 기회를 노리며 눈을 돌리는 것을 알았는지, 히어로들 중 한명이 흘깃 눈치를 보며 다나를 부른다. 


"서장님?"


"됐어. 저 놈들 잡아라."


오래 가지는 않네. 메두사가 작게 혀를 차는동안, 오르카가 얼른 그녀 앞으로 서 싸울 태세를 취했다. 안 좋다. 히어로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둘을 둥글게 포위하며 비웃음을 지었다. 오르카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다나 앞에서는 쪽도 쓰지 못할 것이 뻔한데다 숫적으로도 우월한 상황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이 양반들은 여즉 뭘 하기에 이리 굼떠? 이 곳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뒷통수를 세게 후려줄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메두사 역시 싸울 태세를 갖췄다. 솔직히 기다려준 게 용한 일이었다. 


히어로들은 사방에서 동시에 덮쳐들어 오면서 그들의 특기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반절 이상이 오르카에게 향하는 것을 곁눈질로 흝어보고 제게 가해지는 총격을 피해 재빠르게 몸을 뒤로 굴렸지만 건물이 무너져내려 뻥 뚫린 공터엔 몸을 엄폐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느릿느릿한 섬유를 조종해서 총알을 막아낼 수도 없는 법이고. 게다가 근접 전투나 육박전 특화의 히어로들은 오르카를 상대하러 갔는지 메두사에게 온 히어로들은 하나같이 원거리 공격형이었다. 그러니까, 다들 멀리서 총탄을 마구 쏴댔다는 말이다. 한명만 가까이 와도 섬유를 이용해 잡아채 인간 방패를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요원한 일이 되었다. 하는 수 없다. 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메두사는 아직까지 크고작은 돌더미들이 쏟아져 내리는 허물어진 건물 사이로 제 몸을 던졌다. 허물어진 콘크리트 덩어리 위를 구르며 엉망진창인 몰골이 되었지만 몸에 구멍이 나는 것보단 나을 것이었다. 


"이러지 말고 대화로 풀어보는 게 어떨까?!"


아무렇게나 말을 내던지면서 메두사 역시 비상용으로 준비한 권총을 꺼내들었다. 상대가 다나라면 총으로는 흠집도 낼 수 없겠지만 히어로들을 상대로는 충분한 무기였다. 숨은 콘크리트 덩어리 위를 두드리는 총격에 고개를 내밀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총만 내밀어 견제사격을 가한다. 탕탕 거리는 총성만이 공터를 휘몰아치며 잠시동안 소강상태를 만드는 듯 했다. 확실한 일격을 꽂아넣으려면 필수적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콘크리트 파편 틈에 숨어있는 그녀를 공격해야한다. 누가 됐든 제일 먼저 다가오는 녀석은 벌집으로 만들어주리라 마음 먹으면서, 메두사는 온 신경을 집중해 권총을 꽉 쥐었다. 반푼이 같은 스푼이 건물까지 날려먹으며 실행한 작전이다. 무슨 수가 있어도 그녀를 잡으려 할 것이다. 건물이 통으로 우르르 무너져내렸으니 그 바보들이 뭐가 잘못 되었다는 걸 알고 빨리 도와주러 와주는 것 밖엔 답이 없었다. 그때까지 오르카가 버텨줄 수 있을까. 차마 고개를 내밀수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엉거주춤 앉아있는 사이였다. 


쾅, 하는. 예측불가능 할 정도로 파괴적인. 어이없을 정도로 커다란 포성과도 같은 소리가 귀청을 찢어버릴 듯이 울려퍼졌다. 귀가 멍멍하니 얼어붙어있는데 제 옆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돌벽들이 기초 철근이 뚝 부러진 채로 폭발하듯이 비산하며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개중에 작은 콘크리트 조각 몇 개가 메두사의 몸 위로도 후드득 튀어올랐다. 


"미친 무식한……"


더 이상 말도 나오지 않았다. 투시 능력자가 위치를 가르쳐주기라도 한 건지, 메두사의 바로 옆만을 휑 뚫어버린 사람. 다나가 제 손을 휘휘 털어 돌가루를 흩뿌리며 붉은 눈동자를 형형히 빛내고 있었다. 앉아있는 메두사를 천천히 내려다보는 그 눈엔 살의가 물씬 담겨 가히 오금이 저릴 정도로 날카로웠다. 


"…명색이 히어로인데 이렇게 건물을 날려먹어도 되는 거야?"


"어차피 철거예정이었다."


메두사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다나가 손으로 휑한 콘크리트 더미를 가리켰다. 겉은 차분해보이지만 속이 얼마나 들끓고있는지 목소리 톤이 잔뜩 낮아진데에다 레이저를 쏘는 특기를 가지기라도 한 듯, 희뿌연 흙먼지들 사이에서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두 말 할 나위 없이 무서웠다. 하지만 어쩐지 그 눈빛에, 그 정직할 정도로 단순한 일념과 맹목적인 분노와 살의가 오롯이 저만을 향한다는 데에서 희열을 느끼면서, 메두사는 씨익 미소지었다.


"역시 최고야 다나는."


"닥치고 죽어."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이. 다나가 손을 내뻗어왔다. 반항하지 않는 메두사의 목울대를 한 손에 움켜쥐고 천천히 힘을 주고 조여온다. 한순간에 목을 부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는 지금부터 널 죽일 거야, 라고 선고하는 듯이 점점 늘어가는 그 아귀힘엔 감동마저 느낄 정도였다. 다만, 상대가 다나라 해도 메두사는 이대로 죽고싶지는 않았다. 슬슬 목근육이 조여지고 숨이 막혀오는 즈음 해서 결국 메두사는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떨궜다.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할 법도 하지만 다나는 이미 메두사를 죽이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인 듯 했다.


그렇기에 살아날 수 있는 거다. 위에서부터 내리누르는 다나의 단단한 팔에 제 목을 맡긴 채, 메두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뱀이 나와봤자 붙잡아버리면 그만이라는 듯한 다나의 생각을 전부 읽을 수 있었다. 아, 이렇게나 다나를 잘 아는 건 나 밖에 없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잘 생긴 사람이랑 죽고 죽일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되었는지 아쉬워 하면서. 메두사는 괴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 랑해……, 다나."


그것은 분명 다나가 예측하지 못한 말이었을 것이다.


"개소리."


다나는 차갑게 내치듯 말하면서도 아귀힘이 살짝 줄어들었다는 것은 모르는 듯 했다. 슬슬 산소가 부족하다. 마음이 급해졌지만 메두사는 일을 재촉하지 않았다. 처연하게 미소지으면서 다시 한 번,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사랑해. 메두사는 살의로 가득차 분노로 번뜩이던 다나의 눈이, 화내지 않기 위해 부여잡고있던 한 줌의 이성으로 순식간에 물드는 것을 보았다. 다나는 분명 다시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여기서 메두사를 죽이느냐 살아서 잡아가느냐를 두고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으로 인해 눈물이 새어나왔다. 제대로 생각하고 있을 정신은 없었지만 메두사는 그 눈물을 이용하기로 했다. 힘없이 웃으면서 그저 제가 가진 모든 감정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사랑해 다나. 맛이 간데다 힘이 없어 맥없어 속삭이는 말이었지만 그게 어떤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했다. 다나가 천천히 제 손을 놓았다. 


"…백모래가 뭘 시킨 거냐."


콜록콜록 잔기침을 뱉으면서 메두사는 간신히 다나를 올려다보았다. 뭘 하려 했느냐고? 마음이 흔들려서 놔줘놓고는 이걸 물어보기 위해서 살려줬다는 듯 뻔뻔하게 나오는 태도가 귀엽기 그지 없었다. 이쯤되면 올 법도 하지 않느냐고. 애타는 마음을 간절히 숨긴 채 대답을 회피하고 기침만 내뱉고 있자니, 돌연 다나가 메두사의 턱을 잡아 올렸다. 강제로 고개를 들어올리게 해 눈을 마주치게 하는 탓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 했다. 무방비한 상태로 저 잘생긴 얼굴을 눈 앞에서 보게 되다니. 


"빨리 바른대로 말해."


"…말하면, 살려줄 거야?"


의도치 않게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눈물을 매단 채 떨려나오는 제 목소리가 자신이 듣기에도 처량하다 싶었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놀라있는 참에 다나가 메두사를 손에서 놓으며 눈을 찌푸렸다. 


"다시 한 번 목을 졸라줄까?"


"아니, 그건 거절하고 싶은데."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메두사는 갈등하면서 눈을 감았다. 여기서 이실직고 하고 고분고분 구는 것이 좀 더 오래 명을 연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주알고주알 정보를 불어댄 걸 들켰다간 백모래에게 어떤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살고 봐야 하지 않겠어. 결국 결심하고 눈을 뜨자마자 돌연 사방에서 홧홧한 기운이 덮쳐왔다. 자욱한 흙먼지를 불살라버리며 타오른 것은 새빨간 화염이었다. 메두사의 주위를 빙 두른 것으로 모자라 콘크리트 더미와 공터 사방에서 동시에 불타오르는 불꽃에 사방에서 비명소리와 탄식이 들려온다. 


"참 빨리도 오시네요!"


메두사가 잔뜩 맛이 간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자, 불 사이를 가로지르며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새까만 정장에 어딘가 촌스러운 색조의 꽃무늬 셔츠를 갖춰입은 다나와는 반대로, 온통 새하얀 정장을 입은 채 눈에 붕대를 두른 곱상한 남자와 녹색의 긴 머리칼을 휘날리는 피부가 새까맣게 탄 검사. 백모래와 송화였다. 송화가 일으킨 불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았던 탓에 다나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 배신자놈." 


기껏 가라앉힌 분노가 다시 차올랐는지 다나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진다. 다나가 한 눈을 파는 틈을 타 메두사는 서둘러 그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는 길에 챙긴 모양인지 송화에 어깨엔 거의 피범벅이 된 오르카가 힘없이 축 늘어져있었다. 황급히 다가온 메두사의 위아래를 천천히 훑어보던 백모래가 불바다 사이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태평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몰골이 엉망이 됐네?"


"이게 다 늦게오셔서 그런 거잖아요!"


어찌되었든 나이프가 무사히 전부 집합했다. 메두사는 그제서야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찾아오라던 건?"


"없어요. 그 전에 건물이 무너졌는 걸요." 


"그래? 아쉽게 됐네."


전혀 아쉽지 않다는 투로 툭 내뱉으면서, 백모래가 휘 고개를 돌려 다나 쪽을 쳐다보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얻은 게 없으니 혼나겠네. 다나 경질 당하는 거 아니야?"


"그럼 저희야 좋고요."


메두사도 뒤이어 다나를 돌아보았다. 백모래와 메두사 둘 다 놓치게 생긴 것에 낭패한 기색이 만연했다. 나이프 일원들을 한 차례씩 흝어보고 째려보는 그 성난 눈을 마주보면서 메두사는 베시시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을 흔들며 휙 등을 돌리자, 뒤에서 정체 모를 악소리가 울려왔다. 단단히 화난 모양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화나면 특기가 사라져서 크게 데일지도 모를 텐데. 남 걱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워진 제 상황에 웃음을 흘리며 메두사는 공터를 벗어났다. 










"그나저나 어떻게 살아남으신 겁니까?"


자꾸만 흘러내리려 하는 오르카를 아예 등에 업은 송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다나와 단 둘이서 일대일 상황을 맞아 살아돌아온 게 적잖이 놀랍다는 말투였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사랑한다고 하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겠어?"


"…아, 예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제 우문을 마무리 하면서, 송화가 눈을 깜빡였다. 그가 알던 다나라면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어떤 말을 듣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상황을 제 눈으로 지켜본 것이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정말 마음이 혹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간 들었지만 결국 생판 남인 그가 다나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모래가 랩터를 사랑해 미친짓을 벌였듯이, 사랑이란 건 결국 어떻게든 사람을 망쳐놓질 않던가. 그 역시 그 감정에 자유롭지 않았고 저 미친개 서장도 사람인 이상 사랑에 흔들릴 수도 있는 법이었다.

그는 잔뜩 헝클어지고 엉망이 된 메두사를 무심히 내려다보면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혹시 어쩌면 모를 일이었다. 




-15.08.18

본편 전으로 생각하고 썼어요. 나이프가 잠수타기 전이 2년 전인가 그러니까 딱 그 정도?

Posted by 까망베르 베베
Backup - etc2018. 9. 17. 02:59

새로 이사온 집은 생각보다 깔끔하니 아름다웠다. 어차피 혼자 살 집인데 넓어서 무엇 하겠느냐는 전제 하에 잡은 집이라 빈말로도 넓다고는 부를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늑한 자신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기쁨에 슬며시 미소지으면서 다희는 휘휘 제 옷소매를 걷어붙였다. 대다수의 짐은 이미 다 건너왔고 남은 건 청소 및 가구 재배치 뿐이다. 힘찬 노동의 첫걸음을 위하여! 환기를 위해 창문을 거칠게 열어제낀 다희는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순간적으로 닥쳐들어오는 찬공기에 한차례 몸을 떨었다.

다시 닫아야되나. 짧은 갈등에 활짝 열린 창 너머만을 멍하니 쳐다보고있는데, 시야 구석에서 무언가 거뭇거뭇한 점이 아스라이 보인다. 잘못 보았나 싶어 창 밖으로 휘 고개를 내밀어보니, 창가 바깥의 좁은 틈새 사이로 웬 털뭉치 하나가 움찔움찔 몸을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들어올려보니, 제 두 손바닥 안에 가볍게 들어오는 작디 작은 고양이다. 

"...?"

찬공기를 오래 쐬었는지 안쓰러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어대는 움직임에 일단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다희는 곧바로 고양이를 제 방 안에 내려놓았다. 어딘지 모르게 단정한 짙은 갈색 털에 먼지 하나 붙지 않은 깔끔한 몸, 깨끗한 얼굴이 딱 집고양이의 뽄새다. 여즉 떨어대는 가녀린 모습에 다희는 얼른 창문을 닫아걸고 조심스레 고양이를 안아들어 제 품 안에 집어넣었다. 집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일러도 틀어놓지 않아 집안 공기 역시 서늘하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따뜻하게 해줄만한 수단이 이것 말고는 없었다. 

"많이 춥냐?"

두 팔로 고양이의 몸 전체를 꼭 껴안으면서, 낯간지러운 느낌에 다희는 낮게 웃었다. 사실 제대 이후 갓 얻은 집이니만큼 이것저것 하고싶은 일들은 많았다. 그 중엔 애완동물을 길러볼까 하는 계획도 있었다.

"너 집이 어디야, 응?"

제 연속된 질문에도 고양이는 외마디 울음도 없이 그저 바들바들 떠는 제 몸을 다희 품 안에 깊숙이 묻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고양이의 등을 제 손바닥으로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다희는 인상을 찌푸렸다. 

일단 그런 창가 구석진 곳에 고양이가 어디서 뚝 떨어져 나타날 수는 없다. 가능성 있는 건 그냥 이 고양이가 어쩌다 창 밖으로 모험을 떠났고, 바로 제 집 창가로 폴짝 점프를 해서 왔다는 것이다. 어떻게 넘어오기는 했는데 다시 돌아가지를 못해서 바들바들 떨고있었던 건 아닐까. 

고작 새끼니까 먼 거리를 이동해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옆집에서 왔나? 일단 제 겉옷으로 고양이를 꽁꽁 싸매놓고, 다희는 다시 창문을 열어 제 고개를 창 밖으로 삐죽 밖으로 내밀었다. 왼쪽 집, 창문 닫혀있음. 오른쪽 집, 창문 열려있음. 

"야. 너네 집 찾은 거 같다."

이사떡이니 뭐니 하면서 이웃집들에 저 이사왔어요, 하고 인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결국은 옆집 초인종을 누르게 생겼다. 외투 안에 쏙 들어간 고양이를 옷째로 들어올려 품 안에 넣어놓고. 결국 다희는 집에 들어선지 5분 여 만에 다시 제 신발을 찾아신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지만 벌써 옆집 문앞이다. 흠흠 하고 헛기침으로 제 목을 다듬으면서, 다희는 조심스레 초인종을 눌렀다. 띵- 동- 하는 소리가 제 귀에도 들린다. 설마 집 안에 사람이 없나 하는 불안도 잠시, 곧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린다. 

"누구세요."

"아, 저 옆집인데... 뭐야, 라시현!?"

그리고 들려온 젊은 여자의 목소리에 일단 한 번 놀라고, 제 앞에 나타난 사람의 익숙한 얼굴에 다시 한 번 놀라면서 다희는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뭐야 대체 뭐야. 그냥 차분하게 안녕하세요 저 옆집 사람인데 혹시 이 고양이가 댁네 고양이가 맞는지요, 하고 물어보기만 하려고 했는데. 왜 라시현이 여기서 나와?

"...류다희?"

관심없고 무표정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던 여자의 눈빛이 곧 깨달음, 그리고 놀람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직접적으로 맞딱뜨리면서, 다희는 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냥 이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얘가 왜 여기서 나와? 제대하고 몇달 보지 않은 사이 전부 잊었었던 것만 같았던 기억이 물밀듯이 쏟아져내려온다. 뺨 맞던 기억, 얼차려 받던 기억, 욕 들어먹었던 기억, 되도않는 것으로 저를 갈구며 못 살게 굴었었던 기억, 매번 부딪치며 원수처럼 으르렁 댔었던 안 좋은 기억, 그러나 결국 열외 타고 말미엔 서로 말도 놓고 그럭저럭 데면데면하게 지내다 먼저 보냈던 기억. 사실 라시현이 제대하고 나서부턴 군생활도 영 밋밋하고 그저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무료하기만 했었다. 

순간적으로 찾아드는 제 이 감정이 반가움인지, 미운 정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아는 사람을 봤다는 놀라움인지 모르겠어서 다희는 그저 멍하니 시현의 얼굴만을 쳐다보았다. 그건 시현 역시 마찬가지라 둘은 별다른 말 없이 그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시현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너, 우리집은 어떻게 안 거니?"

"나 어제 이사왔는데."

"옆집? 그게 너라고?"

나긋하게 되묻는 물음이 딱 그때 그 시절, 수경 시절의 라시현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다희는 소름이 돋는 기분에 조용히 수긍하면서 제 품 안에 있던 외투 속 고양이를 슥 들어올렸다.

"니 고양이냐?"

"...걔가 왜 너한테 있니?" 

그러게, 나도 모르겠다. 어정쩡하게 서서 고양이만 슥 들어올리고 있자니, 제 등을 훑고가는 찬바람에 뒤늦게 추운 감이 들어서 다희는 부스스 몸을 떨었다. 고작 옆집 가는데 다른 겉옷 찾아입기도 귀찮아서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왔더니만 생각보다 날씨가 추웠다.

"...일단 들어와."

"뭐?"

고작 옆집인데 내가 뭣하러? 어차피 고양이 주인인 거 확인하면 고양이만 휙 던져주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다희가 주저하며 되묻자, 시현이 곧 조용한 눈빛으로 차분히 다희를 응시한다.

"류다희. 들어와."

어떤 말을 더 할까. 문 안에서 저가 들어오기 쉽게끔 자리를 만들며 비켜주는 시현의 모습에 결국 다희는 뒷말없이 조용히 집 안으로 제 몸을 들였다. 들어오라는 말에 자동반사적으로 들어와버린 것이 꼭 한창 때의 군인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제대한지 몇달이 지나서 이제 끝났다 하고 있었는데, 군복무 시절 같은 소대 선임을 만나니까 몸이 마치 현역 때처럼 움직여버렸다. 라시현이 그때처럼 저런 얼굴을 하면 다희는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여긴 사회야 류다희, 군대가 아니라고!'

소리없이 한탄하면서 다희는 조심스레 고양이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같은 오피스텔이라 시현의 집 구조는 제 집이랑 별 다를 바가 없다. 가구배치나 세세한 인테리어는 조금 달랐지만 그런 것에 눈이 가지는 않았다. 제 뒤에 라시현이 있는데 그런 것에 신경이 갈 리가 없었다.

"앉아."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시키는 대로 쇼파에 가서 앉고나니 그제야 집 안이 한 눈에 들어왔다. 고양이 집, 고양이 장난감 몇 개, 꺼져있는 티비 한대와 깔끔하니 새하얀 싱글침대. 조금 전까지 사람이 앉아있었던 듯 엇나가있는 의자와 테이블 위 홀로 켜져있는 노트북, 작게 웅웅대는 세탁기와 작은 냉장고, 따뜻한 바닥 아래에서 제 몸을 덮는 큰 옷을 빠져나오기 위해 조용히 바둥대는 고양이 한 마리와, 라시현. 

언제 들고왔는지 양 손에 따뜻한 김이 나는 머그잔을 든 시현은 곧 한잔을 다희에게 내밀었다. 자연스레 받아들고 한 모금 머금어보니 향 좋은 커피다. 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답답하고 막막하고 조금 아련한 것도 같고 반가우면서도 그에 못지 않게 어색해서, 다희는 그냥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는 기분으로 되는대로 입을 열었다.

"그, 고양이가 우리집 창 밖에서 떨고있더라고." 

"그래?"

그래? 그래. 어떡하라는 거지. 대화가 이어지지는 않는데 무슨 말은 해야할 것 같고 또 그러면서도 어떤 말을 해야할지 전혀 모르겠어서, 결국 다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제 손에 들린 커피나 홀짝이면서 시현을 보니, 저 멀리 떨어진 의자에 앉아서 홀로 고고하니 턱을 괴고 있는 것이 마치 전혀 관심없는 듯한 눈치였다. 

"제대한 지 두달은 됐니?"

커피를 홀짝이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시현이 다희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류다희?"

다른 생각을 하고있으니 고개를 끄덕여도 보지를 못하지. 속으로 툴툴 대면서도 다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치 바톤을 넘겨받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너, 너 고양이도 길렀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지만 사실 오랜만에 다시 만나고 얼마 안 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이기도 했다. 라시현과 고양이는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잘 어울리는 면이 있었다. 도도하고 얌전하고 나긋한 것 같으면서도 까칠할 땐 한없이 까칠하고, 날렵하고 사나우면서도 영악한 것이 시현은 딱 고양이 꼴이다. 속으로 둘이 딱 맞는다고 박수를 치면서 다희는 슬쩍 시현과 고양이를 번갈아보았다. 

"학교는?"

질문에 질문으로 되돌려주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제 질문이 씹힌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시현인 걸. 그냥 제 멋대로 저 좋을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홀로 납득하면서 다희는 그냥 어물쩍 대답을 얼버무렸다. 어차피 아직 복학하지도 않은데다 솔직히 복학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마음속으로 갈등도 일었던 탓이다. 군 제대 후 누구나 느끼는 일종의 막막함과 현실에 대한 유리감을 아직 벗어내지 못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 관한 질문을 들으면 딱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 얘기를 꺼내고 싶지도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적응 안되지?"

그래도 조금이나마 더 먼저 사제 공기를 맡았다고, 니 마음 다 이해한다는 식으로 툭 내던져지는 시현의 말에 다희는 그저 말없이 제 몸을 움츠렸다. 솔직히 그랬다. 시현이나 다희나 사회에 서면 그냥 둘 다 비슷한 입장의 비슷한 사람이겠지만, 언제나 라시현은 류다희보다 앞서나가고 있었다. 시현은 몇달 먼저 들어와 다희를 가르치는 선임이었고, 몇달 먼저 제대해 더욱 빨리 적응한 사회인이며 또 지금은 갓 제대한 의경인 다희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선배였다.

"류다희."

"응?"

"너, 술은 잘하니?"

"...뭐?"





*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둘은 마치 약속한 듯이 나란히 일어났고, 다희는 시현의 등 뒤만 쫓아다니면서 시현이 안내하는 술집으로 쏙 들어갔다. 제대하고 한동안 이 친구 저 친구 다 만나가며 앞뒤 안보고 술만 마시고 다닌 탓에 솔직히 술에 자신 있었기도 했고. 그래서 이 얘기 저 얘기, 의경 시절 얘기와 사회 이야기, 고양이 얘기니 뭐니 별 자잘하고 기억도 안 나는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공감하고 웃고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다. 제 집까지 제대로 걸어오지도 못해 비틀비틀 대고 길바닥에 드러누울 뻔 했다가 간신히 시현의 도움으로 오피스텔까지 왔던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제 집 앞에서 도어락을 눌러대다가 하도 정신이 없어서 엉망진창으로 틀려대고, 결국 문 앞에 머리를 처박아가며 열려라 참깨를 외치다가 시현에게 붙잡혀 집으로 끌려왔던 것까지.

그 모든 기억들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제 옆에 누워있는 라시현이 증명하고 있었다. 다희는 깨질듯이 아파오는 두통을 감내하고 부끄러움과 쪽팔림, 당황과 수치 등으로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가운데에서도 차근차근 제 기억을 되짚어갔다. 마지막 기억은 시현의 손에 의해 새하얀 침대 위로 눕혀지던 기억이다. 분명 저 혼자 드러누웠고, 편안한 느낌에 거의 기절하듯 잠들었던 것이 기억나는데 문제는 어째서 라시현이 옆에 누워있냐는 것이다. 더군다나 다희는 시현의 오른팔을 마치 베개라도 되듯 꼭 끌어안고 누워있었다. 지금도 제 품 안에 얌전히 안겨있는 이 마른 팔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은 혹시 그 반동으로 라시현이 깰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으으..."

전후좌우 구분도 안 가고 그냥 머릿속을 믹서기로 휘저어놓은 듯이 정신머리라고는 하나 없고 복잡하기만 한 상황이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다희는 그저 본능과도 같이 최대한 큰 소리 없이, 큰 움직임 없이 시현의 옆에 누워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고자 했다.

"아, 씨발..."

강제 얼음이 되어 누워있는 상태로 기억을 차분히 되짚어보니 일단 그것 외에는 딱히 실수한 것이 없는 듯했다. 토하지도 않았고, 주정부리다 라시현에게 욕설을 내뱉지도 않았다. 너 때문에 그때 존나게 힘들었었다라고 우물우물대며 말한 것도 같지만. 아, 미쳤구나 류다희. 무슨 정신머리로 이렇게 죽자고 술을 마셨니. 제 핸드폰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아서 시간을 아는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해가 뜬 것 같지는 않으니 그렇다면 아직 한밤중이거나 새벽일 것이다. 그러니 시현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것도 요원한 일이다. 

일단 팔이라도 빼내볼까. 군 시절 내내 견원지간 처럼 지내던 둘이다. 아무리 지금 사회에 나가 둘 사이 입장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그 라시현의 팔을 꼭 끌어안고 잠드는 꼴만은 피하고 싶었다. 꼬물락대면서 먼저 제 손가락 깍지를 풀었다. 슬슬슬 천천히 제가 부여잡은 힘을 풀어낸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소리없이 팔을 빼낸다. 한참 후,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다희는 제 두 팔을 시현에게서 완전히 떼어낼 수 있었다. 팔을 빼내기는 했지만 다희의 바로 가슴 위에 시현의 팔이 올려져있기 때문에, 다희는 이번엔 시현의 팔을 천천히 밀어내기로 했다. 부드럽게 반으로 접어서 시현에게 되돌려주면 아주 완벽한 탈출 그림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소리소문없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다희는 먼저 시현의 팔을 살포시 붙잡았다. 깡말라 살집 하나 없는 팔이 다희의 손 안에 쏙 들어왔다. 왜 이렇게 말랐대. 제대한 지 좀 되었으니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술도 많이 마시면서 여기저기서 살을 좀 찌웠을 법도 한데, 오히려 라시현은 제대 전보다도 조금 마른 것 같았다. 쯧. 제 몸관리 하나 못하면서 어찌 나라를 지킨다고. 이 깡마름이 불편하고도 조금 안쓰러워서, 다희는 슬쩍 고개를 돌려 누워있는 시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보고말았다. 재미있는 것을 본다는 듯 입꼬리가 올라간 부드러운 시현의 얼굴을. 놀라울 정도로 무방비한, 경계나 적의 따위 하나없는 부드러운 표정이어서 처음에 다희는 시현이 저를 보고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라시현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나, 하고 놀랐을 뿐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다희는 곧 제 가슴 위에 올라앉은 이 팔의 주인공, 제가 그렇게 열심히 치우려 고군분투하던 팔의 주인인 라시현이 저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간 다희가 그 팔을 치우기 위해 했던 모든 과정들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웃음기 담긴 입꼬리가 그 모든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왜, 더 해보지?"

죽고싶다.

보나마나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올랐을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다희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비명 지르며 발버둥칠 수만 있다면 분명 그리 했을 것이다. 다만 시현의 눈빛 앞에선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가소롭다는 듯, 그 발악을 지켜보겠다는 듯 비웃는 낯빛으로 내려보는 눈빛도 그러했지만. 이런 식으로 부드럽게 저를 바라보는 눈빛 앞에서도 결국 저가 무기력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류다희."

"......"

"류다희. 다희야." 

"...왜."

불러놓고 별 말 하지 않는 건 똑같았다. 잘하자, 라는 말이 귓가를 울린다. 라시현은 항상 그랬다. 먼저 이름을 불러놓고, 고저 없이 평탄한 낮은 목소리로 으스대지 않고 그저 한마디만 하고는 했다. 잘하자, 혹은 기억해둘게. 그렇게 오버랩되는 모습과 함께, 시현이 조용히 제 입을 열었다.

"얌전히 자."

발버둥 치지 말고. 덧붙여 흘러나오는 말에 결국 다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발버둥 치는 것도 멈춘 채 얌전히 천장을 쳐다보며 눈을 감는데, 제 가슴 위에 나앉은 팔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슬쩍 고개를 돌리면서 다시 말을 붙인다.

"저기, 팔 좀 치울게."

제 몸 위에 올라앉은 팔 하나 치우질 못하고 결국 슬슬 허락을 구하는 꼴이라니. 왜 라시현 앞에만 서면 이렇게 무기력해지느냐고 다희는 스스로를 구박하며 시현의 팔을 살짝 들어 내려놓았다. 

"...팔 달라고 아우성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러니?"

"뭐! 내가, 내가 그랬다고?"

"..."

그럴 리가 없다고 사실을 부인하려고 해도 찔리는 것이 있어서, 결국 다희는 제 손으로 얼굴을 푹 덮어버리며 으아아 한숨을 내뱉었다. 저 라시현이 먼저 제 몸 위에 팔을 올릴 일은 없을 것이니 결국 답은 그것 밖에 없다. 왜, 하필. 라시현이냐고. 어째서 이렇게 되었냐고 스스로에게 되물어봐도 답은 돌아오지를 않는다. 

좋아, 류다희. 잠도 다 깼으니 집으로 간다고 하자. 집으로 간다고 해버리자. 그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 뿐이라 결국 다희는 헐레벌떡 침대를 벗어났다. 그리고 바닥에 발을 내려놓고 한 발자국 떼자마자, 어지러움이 엄습한다. 숙취란 것이 언제나 그렇듯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두통은 사그라들었어도 어지럼증은 그대로였던 것이다.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엉거주춤 일어난 바람에 결국 다희는 넘어지듯 침대 위로 나동그라졌다. 바닥에 쓰러진 것이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야하겠지만, 아무래도 다희에게 다이렉트로 깔려버린 시현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윽...... 하, 류다희..."

고통어린 신음 속에 원망의 기운이 담겨있다. 다희는 시현의 안색을 살피고 미안하다 말하며 결국 다시 제 몸가짐을 가지런히 한 채로 침대에 얌전히 누웠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아파서 찡그린 시현의 낯빛이나 잔뜩 낮게 깔려나오는 신음소리와 자그맣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야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희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솔직히 그랬다. 시현은 집 안이라고 부드럽고 여린 몸이 다 드러나는 편한 골지 티셔츠를 입은 듯 했다. 그 바람에 신음하며 잠깐 몸을 비트는 사이에 그 여성스럽고 가냘픈 목이나 어깨선 등 전체적인 실루엣이 한 번에 다희의 눈에 들어왔다. 새삼스레 라시현이 마르고 얇고 가녀린, 정말이지 연약해보이는 체형의 소유자라는 것을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류다희, 너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니. 결국 다희는 숙취가 제 눈까지 미치게 만들었다고 고개를 뒤흔들었다. 그리고는 아까와 달리 천천히 조심스럽게 침대 밖을 나섰다. 침대를 등진 채 바닥에 조심스레 누워 아무 것도 못 봤다고 아무 것도 못 들었다고 주문을 걸며 질끈 눈을 감는다. 그런 제 등을 쳐다보는 시현의 시선이 찌르듯이 느껴졌지만, 다희는 결코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심호흡 하며, 차분히 말을 정리한다.

"여기서 잘게."

"바닥에서 잔다는 거니?"

"..."

"가지가지 한다, 류다희."

한숨과 함께 시현이 돌아눕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하고 침을 꼴깍 삼키면서 결국 다희는 어거지로 눈을 감았다. 다희는 이제 제 발 밑에서 야옹, 하고 우는 작은 고양이와 함께 잠들듯 잠들지 않는 긴 밤을 지새우게 되는 것이었다. 이웃집 사람이 라시현이라는 이 대단한 우연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면서, 부디 이 순간이 꿈이기를. 그러나 또 마음 한구석으로는 꿈이 아니기를 바라는 제가 있었다. 

모르겠다. 미운 것도 같고, 좋은 것도 같고. 하지만 사실 그런 감정보다는 그래, 그것이 제일 컸다. 다희는 시현이 반가웠다. 군대라는 특별한 공간 속에서 같은 시간과 경험을 공유한 사람을 사회에서 만나는 것은 굉장히 미묘하면서도 기쁜 만남이었다. 바로 오늘 같이 술잔을 나누면서 다희는 새삼스레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의경 라시현과 사회인 라시현은 다르면서도 같은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다름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면의 다름이다. 각박하고 모진 군대와는 달리 인간 됨됨이가 드러나는 사회, 개인적인 술자리에서의 교류는 그간 다희가 품고있었던 시현에 대한 시선을 무르게 만들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솔직한 제 기쁨과 기분을 음미하면서, 다희는 이 우연한 만남이 나쁘지는 않다고 조용히 시인했다. 잠시 뒤 침대 위에서 들썩이는 움직임과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얼마 안가 다희의 몸 위로 부드러운 천 이불이 내려앉는다.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어주는 시현의 모습이 보지 않아도 선하다. 라시현에게서 결코 기대해본 적 없는 이 친절과 매너에 소름이 돋는 것 같으면서도 그것이 기쁘게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다희가 시현에게서 어떠한 인간적인 선을 기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군대 내에서는 보여주지 않았던 라시현의 또 다른 면모 말이다. 

제 몸을 덮는 이불을 끌어안으면서 다희는 조용히 생각했다. 라시현은 어쩌면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전처럼 질색하고 기피할 것이 아니라 어쩌면 한두 번쯤은 더 만나고 이야기해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이 곳은, 군대가 아니니까. 

오늘 이 순간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이 다가가기엔 이미 다희 저가 상당히 취한 상태이고 창피한 감도 없잖아 있었기에 결국 그 새로운 마음을 내일의 자신에게로 토스하면서, 다희는 차분히 눈을 깜빡였다.













<설정> 

1. 류다희 얼굴이 라시현 취향 핵직격임. 라시현은 그래서 의경 생활 시작하고 다희가 후임으로 들어왔을 때 솔직히 개깜짝 놀람.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해서 잘해볼까 하는 생각도 없잖아 있었는데 의경 생활이 워낙 욕나오고 결국 성격 배리면서 다희가 막 동기 챙기고 민지선한테 뽈뽈 대며 꼬리 흔드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해서 사이 틀어지고 괴롭히기 시작한 것. 

2. 근데 제대하고 류다희 보니까 존나 말이 안 나옴. 일단 그 전에도 생긴 게 존나 취향이었는데 사회 나와서 가꾸기 시작한 다희라 안 그래도 이쁜 얼굴인데 외모가 아주 물 오른데다가 사복 차림에 뻑감. 고양이 안고 추워서 바들바들 떠는 것도 보호본능 자극해서 완전 마음에 듬.

3. 술 주는대로 잘 마시길래 잘 하는 줄 알고 계속 달림. 사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어느 정도 있기는 했는데 그래도 그냥 취한 게 보고싶었을 뿐이지 어떻게 해볼 생각까지는 없었음. 근데 애가 막 자기 집 문 앞에 머리 박고 문 열어주세요 하고 기도하고 있질 않나 결국 밖에서 그러는 게 불쌍해서 그냥 집에 데리고들어옴. 그리고 침대에 눕혀놓고 그냥 자긴 바닥에서 자려고 하는데 다희가 취해서 시현이 붙잡고 안 놔주질 않나 결국 못 이기는 척 침대에 같이 누웠음. 팔은 진짜로 다희가 잡고 안 놔준 거. 나중에 잠 깬 다희가 팔 빼내려고 낑낑대는 모습이 귀여워서 살짝 웃고있었음.

4. (미래) 류다희는 어차피 옆집이겠다 인연도 있겠다 라시현이랑 친해지고 더 알아가면서 의경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그 차이를 곱씹으며 시현이를 관찰하면서 재인식의 과정을 거치다가 결국 빠져버린다고 합니다. 시현이는 이미 한참 전부터 다희한테 호감이 있는 상태였고 결국 둘이 썸타다 사귈 듯.

5. 나중에 다희는 시현이네 고양이한테 우리집 창문으로 넘어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함.







-15.11.02

'Backup -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드 오브 히어로즈) 라이루실 - 몸의 대화(19+)  (0) 2020.07.19
(마마마) 마미호무  (0) 2018.09.17
(롤) 카타리나 & 럭스  (0) 2018.09.17
(이영싫) 메두다나  (0) 2018.09.17
(뷰군) 시현다희 - 오피스  (0) 2018.09.17
Posted by 까망베르 베베
Backup - etc2018. 9. 17. 02:57

미친년. 샹년. 개년. 시발년. 어떤 단어로 표현해도 부족할 것만 같은 여자가 있다. 영악하고 이기적이고 까칠하고 복잡해서, 감히 그 싸가지없음을 재단하기도 힘든.

"씨발!"

존나 까탈스럽기가 고슴도치보다 더한 년. 담배 필터를 씹어물면서 다희는 죄없는 가슴팍만 퍽퍽 내리쳤다. 속 안에 응어리 진 것이 오갈데없이 가득차 손발까지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은 터질듯이 박동해 제대로 호흡하기도 힘들었다. 분노로 부글부글 끓는 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라이터를 딸각이면서. 다희는 조용히 욕설을 내뱉었다. 별 것도 아닌 일이었다. 명령이 꼬였다. 두 상사가 각기 같은 일을 지시하면서 결과적으로 같은 일을 다른 방식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둘 모두 그들만의 방식이 있는 사람이라 어쩔 방도가 없었다. 각자의 방식에 맞춰 따로 진행하느라 진도가 더뎌졌고, 결과적으로 시간 내에 맞추지 못 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그 시발. 후. 라시현이 그걸 발견했다. 대놓고 다희의 능력과 일처리를 비꼬면서, 다희가 마무리 한 서류를 쓰레기처럼 내던진 것이다. 

'다희 씨 능력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 유두리 없이 그걸 곧이곧대로 따라들어서 실행해요? 틀린 것 같으면 알아서 제 선에서 수정하는 게 정답 아닌가?'

여기가 군대인 줄 알아요? 하고 비웃던 라시현. 갑갑하게 채워진 블라우스 단추를 거칠게 풀어내면서, 다희는 제 손 안에서 우그러진 담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장초고 뭐고 보이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칙칙 거리며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낼 뿐 불이라고는 올라오지 않는 라이터도 마찬가지였다. 손에 들린 모든 걸 바닥에 내던져버리고 가슴께를 쥐어뜯었다. 숨이 막히고 홧홧대는 열이 차올라오는 것이,

"홧병났니?"

"그래! 홧병 씨발 홧병!"

버럭 반사적으로 소리를 내질렀다가. 다희는 곧 얼음처럼 굳어졌다. 

"어, 저... 라시현 선배님?"

"왜? 류다희."

둘만 있다고 바로 말을 놓는 그 변화무쌍한 모습에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말을 잇지 못하겠다. 다희는 그저 낭패한 제 기색을 숨기기 위해 헛기침을 하면서 말없이 손바닥을 털었다. 손가락에 묻어난 담배 찌꺼기를 훌훌 털어내면서 어색하게 서있자, 군시절과 거의 변한 것이 없는 시현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불러놓고 제사 지내니?"

"...아뇨. 아닙니다."

"왜 그렇게 굳어있어?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다니?"

"..."

어떻게. 라시현을 군대 안에서도 모자라 사회에서까지 마주칠 수가 있을까. 어긋나도 잔뜩 어긋난 제 운명을 원망하면서, 다희는 입술을 짓씹었다. 군시절 내내 저와 반목하며 부딪히더니만 결국은 직장 상사로 다시 나타나 이제 새로이 저를 괴롭힌다.

"귀신 본 것처럼 서있지 말고 담배나 한대 줘볼래?"

"금연하신 거 아니셨습니까...?"

"누구 얼굴을 보니 담배가 다시 말리네. 안 좋은 기억도 조금 떠오르고."

전혀 힐난하는 기색없이 평탄한 어조로 중얼이면서, 시현이 냉막한 눈으로 다희를 응시한다. 그게 꼭 마치 다시 군시절로 되돌아간 것만 같아서 다희는 심란한 기분이었다.

"왜 그런 눈이니?"

니가 나보다 잘 알겠지. 마음속으로 중얼이면서 결국 다희는 시현에게 제 담배를 내밀었다. 바닥에 내던진 라이터도 주워들고와서 다시 불을 붙여올린다. 그런 제 행동을 지켜보는 시현의 눈빛이 마치 얼음장같이 차갑고 사무적이어서 다희는 찬찬히 소름이 돋는 듯해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전과 같았다. 소리없이 들이킨 연기를 제 앞에 대고 내뿜으면서, 시현은 차분하게 다희의 뺨에 제 한 손을 올렸다. 더 이상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 손길은 턱을 타고 목으로 내려가 잔뜩 풀린 블라우스 안의 다희의 하얀 살 위로 내려앉는다. 그 손길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서있는 채로, 다희는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짜릿한 긴장과 오한을 다스리기 위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후... 잘하자, 다희야."

흐릿하게 내려앉은 눈빛으로 다희의 쇄골께를 쓰다듬으면서, 시현이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15.11.05


'Backup -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드 오브 히어로즈) 라이루실 - 몸의 대화(19+)  (0) 2020.07.19
(마마마) 마미호무  (0) 2018.09.17
(롤) 카타리나 & 럭스  (0) 2018.09.17
(이영싫) 메두다나  (0) 2018.09.17
(뷰군) 시현다희 - 헤프닝  (2) 2018.09.17
Posted by 까망베르 베베
2018. 9. 17. 02:52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Backup - SNJS2018. 9. 17. 02:48


"직접 해보고 싶다는 건 아니겠지?"

AR 15가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RO의 눈이 더 이상 없을 정도로 크게 뜨였다. 정면으로 드러난 당혹을 감추지도 못한다. RO는 이전보다 더욱 심하게 허둥대며 몸을 가누지 못하더니 드디어는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불안정한 눈빛이 그녀의 방 안 사방으로 튀고, 얼마 안 가 AR 15의 앞으로 흐른다. AR 15는 눈을 피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RO와 곧바로 시선이 맞닿았다. 그녀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자, RO가 은근슬쩍 손을 내린다.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한 듯 꼿꼿이 허리를 세운 RO가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부탁할……, 아니, 역시 아니야."

마음의 준비는 곧바로 허물어진 게 분명하다. RO는 좌절한 듯 허탈하게 고개를 숙였다. RO가 어떤 마음으로 그녀의 방에 찾아온 것인지 이제야 짐작이 가게 되었다. AR 15는 RO의 놀라울 정도의 결단력에 가볍게 감탄했다가, 반대로 끝에 다다라서 나타나는 자신감 없는 태도에 한숨을 내쉬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실 그녀 입장에선, 섹스라는 게 별 다른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강제로 취하려 드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허락을 구한다라. 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신선한 느낌에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돌연 M4의 생각이 봇물 터지듯 흘러들어온다. 동시에 어떤 탁류가 그녀의 가슴께를 두드리며 넘실대기 시작했다. 코어를 쥐어 터뜨리는 듯한 압박감에 놀라 숨을 내쉬었지만 기도는 멀쩡하다. AI가 계산하지 못하는 이 정체 모를 답답함, 그녀는 제 속을 찔러대는 바늘과도 같은 아릿함이 불쾌해졌다. 서둘러 고개를 젓고 이 모든 것을 떨치듯이 손을 뻗는다. 그렇게 RO에게 가볍게 손짓하면서, 드디어 한마디를 뱉었다.

"이번 한 번 뿐이라면, 좋아." 





-





이후 RO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녀는 손을 뻗어 RO를 붙잡았고, 조금 다급한 기색으로 제 몸을 맡겼다. 그녀의 마음이 느닷없이 변화한 만큼 RO 역시도 급변한 상황에 잠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RO는 끝끝내 허락을 구하듯 AR 15의 얼굴만 몇 번이고 돌아보다가, 거의 얹듯이 제 손을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두었다.

"…뭐하는 건데?"

"…아……."

재미있는 것은 AR 15가 모처럼 마음 먹은 것과는 달리, 그녀와 호흡을 맞춰야 할 RO가 거의 동상이 된 채 얼어붙었다는 사실이다. RO는 끝없이 AR 15의 눈치를 보면서 1초에 1cm씩 손을 움직였다. 그 느릿느릿하고 답답한 손길은 애무도 뭣도 아닌데다가 무겁고 갑갑하기만 할 따름이다. AR 15는 결국 이 모든 상황을 자신이 리드해야 한다는 걸 인지했다. 이 모든 일을 설명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건가, 아연실색한 그녀가 헛숨을 턱 뱉자 화들짝 놀란 RO가 손을 떼어낸다. 결국 그녀는 조용히 RO의 손목을 틀어잡았다. 힘주어 손을 들어, 제 가슴 위에 끌어놓는다. 민망하다거나 부끄럽다는 느낌은 일지조차 않는다. AR 15의 가슴 위에 내려앉은 손을 바라보는 RO의 얼굴이 오히려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RO는 엉거주춤 올라앉은 제 손을 잠시간 꼬물거리다가, 마치 간을 보듯 느릿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녀는 새어져나오는 한숨을 막지 않았다. 

"…하아……. 안 말릴 테니까, 마음대로 해."

"으, 응……."

못 미더운 대답과 동시에, 드디어 RO가 그녀의 원피스 끈을 부여잡았다. 주저하는 손길은 눈치를 보듯 몇 번씩 멎었지만 결국엔 AR 15의 옷을 벗겨내는데 성공했다. 장족의 발전이라 해야 할까. 과도할 정도로 느린 진행에 그녀가 채 내쉬어지지 않는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예고없이 RO의 손길이 멈췄다. 손길이라 해도 그녀의 피부를 조심스레 쓸어내리던 약간의 접촉이 전부였지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그녀는 천천히 RO의 눈을 찾았다. 확연한 떨림을 간직한 두가지 색의 눈동자에선 긴장과 흥분, 이유 모를 공포마저 느껴지는 듯 하다. 그녀가 관찰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RO가 황망한 눈으로 AR 15의 맨몸을 훑어내렸다. 그러다가는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

제일 먼저, 균형이 무너져 다소 가빠진 호흡이 와닿았다. 돌연 제게 안긴 RO를 어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AR 15가 어정쩡하게 굳어져있는 때였다.

"…AR 15 너는 이런 게, 아무렇지도 않아……?"

작은 목소리로 저어하는 물음이 주어졌다. 오늘 제시된 RO의 질문은 모두 핀트가 어긋난 뜻 모를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없고 허한 단어와 문장들 사이엔 미세하게 새어나오는 진심의 끝자락, 숨겨진 꼬리들이 있다. 이제 그녀는 RO에게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뿐이다. 거기에 응대해줄 이유도, 필요도 없다. 하물며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더욱.

"…아무렇지도 않아."

섹스가 필요하다면, 그저 어울려줄 뿐이니까.

RO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올린다. RO가 원하던 답을 찾았는지 아닌지 AR 15로서는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짧은 문답을 끝으로, RO의 눈빛이 뒤바뀌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주저하던 손짓에서는 이제 더 이상의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RO는 가장 먼저 그녀의 어깨를 매만졌다. 차갑게 식어내린 인공 피부를 덥히며 내려앉는 따뜻한 손길은 마치 위로하는 듯이 그녀의 맨몸을 품어 안는다. 잠시 잠깐 어깨를 두드렸다가, 도드러져 나온 쇄골을 지나치듯 손가락 끝으로 짚어내린다. 빈 도화지에 점을 찍는 것처럼 산발적으로 난발하는 애무 사이로 AR 15의 몸이 눕혀졌다. 아프지 않게 그녀를 내리누르는 힘에선 어떠한 결단과 각오마저 느껴지는 듯 하다. 

그 모든 손길은 확실히 미숙했다. 어디를 어떻게 어루만져야 상대가 흥분할 수 있는지, 느끼게 할 수 있는지 어느 하나 잘 알지 못 하는 어리숙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황급히 이어지는 욕망과 열기만은 그녀의 피부로 홧홧하게 와닿아 등골을 쩌릿하게 하는 기분을 선사했다. 이렇게나 그녀를 원하고 있다는, 상대의 그 열망과 욕구의 발현은 AR 15 그녀 자신에게 묘한 충만감을 안겨주기 충분했다.

가슴 위를 짚었다가 그 언저리를 눌러내리며 희롱하듯 유영하는 손가락과,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상냥하게 닿았다 떨어지는 부드러운 키스들. 아프지 않게 살점을 깨무는가 싶더니 그 위로 뜨거운 숨이 뱉어내린다. 콧날로 목을 타듯 쓸어내리고,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혀가 피부 위를 노닐며 몸을 긴장시킨다. 혀로 핥아내린 그 자리를 뒤따라 마른 입술이 살을 축이며 지나쳐 그녀의 쾌감을 이끌었다. 그 모든 것들이 차분히 내려앉아 마침내 AR 15의 중점까지 와닿았을 때, 그녀는 빈 말로도 자신이 흥분하지 않았다 할 수 없으리라 깨달았다. M4가 제공하는 자극적이고 열락에 가득찬 무언가는 없었지만, RO의 애무는 분명한 효과가 있었다. 온몸이 간질거리고 아래 부근이 묵직하게 달아올랐다. 닥쳐올 희락을 아는 AR 15의 몸은 이미 스위치가 올라간 채 주어질 자극만을 기다리는, 가련한 사냥동물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RO의 진중한 눈빛이 그녀를 꿰뚫듯 꽂혀온다. 긴장으로 잔뜩 굳어진 낯과 허락을 구하듯 저를 들여다보는 눈빛. 그 모든 낯선 시선에 AR 15는 몸을 가누기 힘든 불안감을 느꼈다. 이런 식으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섹스해왔던 적도 없었고, 또 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와서도 제 의사를 되묻는 친절함과 접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익숙지 않은 교류에 마음이 조급해져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RO의 부자연스러운 태도가 꼭 그녀를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RO와 접하는 모든 행위 자체가 낯설고 기이한 감각을 낳았다. 그녀는 이 불온한 느낌을 무어라 정의해야 할 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관계 이후로 많은 것이 변화하리라는 것만은 확실히 깨달았다. 어쩌면 RO와 섹스하겠다 한 AR 15 그녀의 선택은,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

"…손가락, 넣을게."

"…일일이 보고하지 마……."

RO의 손가락이 잔뜩 달궈진 몸을 관통한다. 좀체 입구를 찾지 못하고 얕게 헤매이던 손가락은 마침내 출입구를 찾자마자 지체 없이 그녀를 파고들었다. 잔뜩 열에 올라 조심성이라고는 없는 투박한 손가락질은 RO답지 않게 성급하고 조급한 기운이 가득했다. RO의 시선이 AR 15를 향해 내리꽂힌다. 정작 삽입을 한 건 자신이면서, 꼭 본인이 받는 입장이라도 되는 양 한껏 커진 눈동자에서는 채 가릴 수 없는 희열이 넘실거리고 있다. 열망과 욕망의 눈빛과 동시에 기이하게 반짝이는 RO의 탐구욕 앞에서는, AR 15도 결국 작게 헛웃음을 내지었다.

"…아……. 생각보다 엄청 좁아……."

도대체 왜 이런 말을 듣고있어야 하는 거지? 그녀는 딱딱하게 굳어가는 제 낯을 알았지만 이를 가리지 않았다. M4와 섹스하며 단 한 번도 불필요한 말을 주고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주어지는 상대의 세심한 감상은 그저 부담스러울 따름이다. 잠시간 RO를 지켜봤지만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저 손가락을 움직이며 그녀 내부를 느끼는 데 몰입하는 모습만이 전부다. 한껏 집중한 채로 시선마저 느끼지 못한다. 열심히 그녀의 아래를 매만지는 맹목적인 접촉엔 어미를 따르는 새끼동물과도 같은 필사적인 분위기마저 있었다. 

AR 15가 기다리던 자극적이고 적극적인 움직임은 없었지만, 그러나 어찌 되었든 양껏 달아오른 몸이다. 그녀는 슬슬 RO의 손짓에 몸을 맞춰주기로 했다. 느릿하고 단순하게 찔러오를 뿐인 손목의 움직임에 따라 허리를 움직인다. RO의 직선적이고 체계적인 움직임은 이성을 등진 채 그저 파괴적 열망을 따라 날뛸 뿐인 M4와는 확연히 달랐다. AR 15는 기분 좋고 포근하게 저를 감싸안는 따뜻한 신체적 접촉에 작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단언컨데 이 모든 것은, 이 감각들은 그녀가 아는 섹스와 다르다. 

그때였다. RO의 움직임이 돌연 뒤바뀌었다. 잠깐 한 눈을 판 것일지도 모르고 다른 생각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제쳐두고, RO의 손가락은 엇박으로 어긋나 엉뚱한 곳을 찔러 튀어올랐고, 아주 우연히도 그녀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포인트를 짚는데 성공했다. 

"…하, 으읏!"

피차 익숙지 못한 관계이고, 가르쳐주겠다는 의도로 앞장선 만큼 딱히 신음을 참거나 해서 반응을 억누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티나게 몸을 튕길 생각도 없었다. AR 15는 참담한 심정이 되어 얕게 몸을 떨었다. 그녀의 새된 신음 이후 우뚝 멎은 손가락에 차마 RO를 쳐다보지도 못하겠다. 차라리 멈추지 않고 계속 되기라도 했다면 괜찮았을 텐데. 그러나 언제까지 시선을 피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내며 조심스레 RO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 잔뜩 놀란 얼굴, 순진하기까지 하던 호기심의 낯은 이제 완전히 뒤바뀌어 있다. 일렁이는 눈망울 너머로 RO의 흥분과 감탄이 엿보였다. 입술을 작게 벌린 채 넋이 나간 것처럼 눈을 빛내는 RO가 희미한 미소를 띄어올린다.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에 가득 차 잘게 떨리는 입술 사이로는, 열망으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AR 15…… 너, 진짜 섹시해……."

"……."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이런 순수한 감탄사는 여태껏 받아본 적도 없었고, 기대한 일도 없었다. 역시 섹스 중엔 이런 쓸데없는 말은 안 하는 게 좋겠어. 영 다른 생각으로 제 민망한 감정으로부터 도망하려 했지만 효과가 있을 리가 없다. 어찌되었든 RO는 AR 15의 모든 반응으로부터 제가 성공했음을 읽어내는데 성공했다. 작은 감탄 이후로 RO의 손가락이 영민하게 다시 짓쳐들었기 때문이다. 이전처럼 헤매이지조차 않았다. 그녀의 스팟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맴도는 움직임과, 춤추듯 가슴을 짚는 자연스러운 모든 손짓에 결국 AR 15는 다른 생각을 포기하게 되었다. 유영하듯 정점을 튕겨올리는 손가락에 움찔 놀라 허리를 비튼다. 부드럽게 가슴을 쥐어 기분 좋게 누르는 손바닥의 움직임엔 한숨마저 나왔다. 계산한 듯, 계산하지 않은 듯 유기적으로 단계를 올려가며 다가드는 손길이 마치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든 신체적 반응과 신호를 읽어내어 차례차례 정복해나가는 이 영리한 포식자 앞에서 어찌 저항할 수 있을까. 

"…하, 아……."

격한 섹스에 단련된 몸은 이 섬세한 접촉으로는 쉽게 절정에 이르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격한 오르가즘 끝에 몸부림 치는 것만이 섹스의 전부는 아니었다. 온몸을 메우는 충족감과 뭉근한 성감에 몸을 움츠렸다가, 몸 끝에 힘을 주며 작게 요동한다. 잘게 떨리는 몸을 수습하지 않는다. 끝에 살짝 못 미치는, 그러나 분명한 절정. AR 15는 저를 껴안은 채 쓰러져내리는 RO를 느꼈다. 기분 좋은 만족감과 타인이 선사하는 체온에 말 못할 위안감을 품는다. 그것은 그녀 안에 내재된 미약하고 분명한 나약함이었으나, AR 15는 이를 채 깨닫지 못했다.

"…아아, 힘들어."

"…무거워. 슬슬 비켜줘."

깊은 움직임으로 둘 다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정리되지 않은 호흡만 번갈아 주고받다가, 결국 AR 15는 RO의 어깨를 약하게 밀어냈다. 섹스는 끝났다. 그러나 한 번 서로의 가장 깊숙한 곳에 발을 들였기에 RO와 AR 15 둘 사이의 관계는 달라졌다. 그녀는 제 바로 옆, 목덜미 아래에 뜨겁게 내쉬어지는 RO의 숨결이 전혀 불쾌하지 않다는 부분에서 새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와 RO는 이제 몸을 나눈 관계가 된 것이다.

나른한 피곤함을 즐기고 있는 사이에 RO의 손이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복부를 쓰다듬는다. 애무라기보다는 그냥 의미없는 손장난이라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말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작게 숨을 내쉬는 데에만 집중했다. RO의 작은 어리광을 받아주자 뒤이어 기분 좋은 듯한 웃음이 귓가로 와닿는다.

"…여태까지 네가 사랑스럽다 생각해본 적은 없었거든. 근데 오늘부턴 아닐 것 같아. 너, 섹스할 때는 정말 다르구나."

이 짓궂은 말엔 AR 15도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다. 몇 번 봐줬더니 맹랑하게 맞먹으려 드는구나. 그녀는 제 배 위를 탐험하는 손을 붙잡아 떨어뜨리며 헛웃음을 뱉었다.

"…다 했으면 이제 그만해."

불퉁하게 쏘아붙이는 목소리엔 일종의 경고의 의미까지 담겨있다. RO 역시 이를 알아 제 손을 뒤로 물렸다. 뒤이어 침대보를 구기며 몸을 일으킨 RO가 제 옷자락 사이에서 손수건을 꺼내어든다. 뭘 하는지 싶어 그 뒤를 따랐지만 이유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RO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가 남긴 흔적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제 밑을 닦아내리는 촉감에 저항없이 몸을 맡긴다. 오늘의 이 관계가 그녀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 지 아무 것도 짐작할 수 없었지만, AR 15는 지금 이 순간 작게 만족하는 자신이 있음을 알았다. 관계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이것으로 된 거겠지. RO는 호기심을 충족하려 했고, AR 15 그녀는 그저 동료를 향해 호의를 베풀었을 뿐이다. 

잠깐의 텀은 있었지만 결국 다시 저를 향해 따라붙는 손길이 있다. 옆구리와 허리를 감싸며 아무렇지 않게 파고들어온 두 팔이 그녀의 몸을 끌어당긴다. 저를 반쯤 품에 안은 채 RO가 고개를 기대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른하고 피곤하니까 굳이 떼어내지 않도록 할까. 따뜻한 체온에 의지해 몸을 내어주면서, AR 15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17.10.16


내용은 이전글인 '엠포스타 - 단절'과 이어지고 있어요.


너무 길게 써져서 그냥 씬만 컷함.

풀버전 : http://privatter.net/p/2828646

'Backup - SNJS' 카테고리의 다른 글

45 & 9 & 416 - 3P  (0) 2018.09.17
엠포스타 - 단절  (0) 2018.09.17
Posted by 까망베르 베베
Backup - SNJS2018. 9. 17. 02:45



꾸욱꾸욱 짓누르듯 얽어매는 손길, 휘돌며 감싸듯 느려졌다 격정을 딛고 도약하는 손짓. 본능과 이성의 완벽한 통제 하에 기계와 같이 춤추는 손가락은 때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부드러웠다가도, 야수의 발톱과 같이 날카롭게 치솟아 올랐다. 계산적인 완급 조절에 흐름을 탄 몸은 자아를 잃고 풍랑에 떠밀리는 조각배가 되어 밀리면 밀리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파도를 따라 요동친다. 그 어디에도 자신의 의지는 없다. 그저 숨 죽이고 감내하는 고철 덩어리. 부자유의 피식자. 그녀가 넋을 잃고 그저 제 안을 휘젓는 힘에 맥없이 들썩거리기만 할 때에, 돌연 상대가 그 흐름을 깨트렸다. 곧게 펴져 내벽을 쓸던 손가락은 굽어진 채로 원을 그리기 시작한다. 잔뜩 젖어든 질 입구를 감싸고만 있던 손바닥이 피부를 꽉 눌렀다가, 여린 살덩이를 부드럽게 쓰다듬듯 풀어졌다. 

갑작스런 행동의 변화에 그녀의 몸이 한 차례 무너졌다. 몸을 지탱하던 다리가 바들거리며 떨리고, 자연스럽게 허리가 굽었다.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온 몸을 물듯이듯 차올라오는 뜨겁고 느린 물살. 척추가 불거져나온 맨 몸을 힘없이 내맡기며, 그녀가 내내 참아왔던 한숨을 내뱉었다. 마치 신호탄과도 같았다. 한 번 숨을 뱉는 것만으로 그녀는 간신히 참아왔던 감각에 전신을 먹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쉬이, 숨 들이마셔요. 입술 깨물지 말고."

"…시끄러워."

기껏 찾아온 배려를 쳐냈기 때문인가? 상대가 재게 놀리던 손을 멈췄다.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희미한 바람소리가 울렸다. 기분이 편치 않은 모양이네. 남 일 생각하듯 하며,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상대와 셀 수 없이 몸을 섞었기 때문인지 그녀는 이제 상대의 숨소리만 듣고도 그 기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 좀 볼래요, AR 15?"

"……." 

"…왜 굳이 힘든 길로 들어가는 거예요?"

"……."

침묵으로 일관하자 상대가 자비없이 그녀, AR 15의 목을 틀어잡았다. 그리고 손아귀 힘으로 그 목을 조이며 강제로 고개를 들어올린다. 어차피 저항없이 이끌려 갈 거면서. 스스로 자조하며 눈을 뜨고 AR 15는 온전히 제 상대를 마주했다. M4, AR 소대의 리더. 부드럽고 무른 것 같지만 사실 M4A1의 안에는 잠재된 흉포성이 있다는 것을 안다. 때로 지배자와 같이 군림하는, 제 목줄을 쥔 인형. M4가 AR 15를 흝는다. 냉막하게 식은 눈으로 관찰하듯 온몸을 쓸어내렸다가, 종착역에 이르러 다시 AR 15의 얼굴로 돌아왔다.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잔정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 그 시선은 사실 AR 15만이 알고있는 M4의 이면이다. 잔뜩 흥분해 짓쳐들어와 저를 마구 범하는 M4, 목을 조른 채 알 수 없는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M4, 그녀의 모든 의지와 자긍심을 흙발로 짓밟고 유린하는 지배자 M4, M4, M4.

…M4, 난 네가……

"…할 만큼, 하…, 했잖아." 

실제로 그랬다. 또 어디에서 기분이 상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상처받은 얼굴로 제 방문을 두드렸던 M4를 기억한다. M4는 정오 즈음에 찾아와선 가타부타 한마디 말도 없이 AR 15을 밀쳤다. 그렇게 침대 위에 힘없이 쓰러진 채로 성난 손길에 따라 제 몸을 비트는동안 어느 새 해가 져버렸다. 한 번 불이 붙은 M4는 말릴 수도 없고 애원을 해도 듣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이 정도로 이유없이 상대를 몰아붙이는 성미는 아니었다. 정말 노리개가 된 것과 같아서, AR 15는 잔뜩 상한 목으로 결국 힘없이 말을 뱉었다. 되도록이면 이런 아쉬운 소리 같은 거 하고싶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는데.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아. 

M4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 웃지 않았다. 입꼬리는 미소 짓듯 올라갔지만 그 눈은 차갑기만 하다. AR 15는 가끔 M4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주로 지금과 같은, 이런 눈으로 자신을 응시할 때. M4의 한 손은 제 숨통을 틀어잡고 있지만 나머지 한 손은 여전히 AR 15의 안을 헤집고 있다. 잠시간의 휴식은 꿈이었다는 것처럼, 곧이어 M4의 손가락이 다시 AR 15의 안을 짓뭉개기 시작했다. 성난 들소처럼 직선으로 크게 곧게 솟구쳐 올랐다가, 뱀의 꼬릿짓처럼 매끄럽게 아래로 흘러내린다. 잔뜩 긴장해 요동치는 AR 15의 섬세하고 정밀한 인공피부, 숨 가쁘게 떨리는 근육과 솟아오른 힘줄들, 뼛대를 음미하면서. 잠깐 쉬었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는 지도 모른다. 밀려나갔던 파도가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물살과 함께 닥쳐들어온다. AR 15는 제 떨리는 몸이 곧 난파당해 휩쓸려 날아갈 것을 직감했다. 발끝부터 종아리, 허벅지, 둔부와 허리,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모든 신체가 불에 달궈진 것처럼 뜨거워졌다. 아, 아. 그녀의 가장 깊은 안에서 또아리를 튼 뱀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그 몸을 활짝 펼치고, 샛노란 눈을 번뜩이며 제 입을 벌린다. 그리고는 그 날카로운 독니로,

"…아, 흣…!" 

"신기하지 않아요, AR 15? 왜 인간은 인형에게 이런 감각을 준 걸까요."

"…하, 아……뭐, 읏……."

"진짜 같은 피부, 이 온기, 촉감들. AR 15는 알아요? AR 15의 안……."

박차를 가하는 손짓과는 달리, M4가 읊조리듯 나지막한 어조로 속삭였다.

"…정말 좋아요." 

AR 15의 귀로 그 목소리는 분명히 흘러들어갔지만, 그녀는 그 말에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잔뜩 억눌려진 신음과 비명을 단말마처럼 내뱉은 후, M4의 품으로 맥없이 고꾸라지고 있었으니까. M4가 제 품 안에서 경련하는 가련한 이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즐겁지만은 않은 웃음이 그 입가에서 줄줄 새어나온다. 마치 비웃는 것도 같은 씁쓸한 잔웃음을 흘리면서 M4가 입을 열었다.

"쉬어요." 







*






M4는 거칠게 손바닥을 비볐다. 손가락을 뽑아 없애버릴 듯이 강렬하게 씻어내리면서, 제 손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를 털어냈다. 아직도 잔향이 남아있는 것만 같다. 깨끗하게 씻어 없앤 AR 15의 향. 손바닥을 펴 제 코 밑에 댄다. 크게 숨을 들이마쉰다. 깔끔한 비누향이 났다. 힘없이 웃으면서 문고리를 잡아돌렸다. 어둑어둑한 묵빛 방이 보인다. 희미하게 새어드는 달빛 아래로 잔뜩 흐트러진 이불과 침대가 드러난다. AR 15의 자켓과 원피스가 침대 밑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옷을 주워 적당히 개켜놓았다. 주인을 닮아 삭막한 방이라 옷가지를 걸어놓을 가구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서늘한 찬기운이 든다. M4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침대 옆에 소리없이 걸터앉아 난잡하게 흐트러진 이불을 손에 쥐었다. 아무렇게나 쓰러져있는 AR 15가 멍한 눈으로 M4를 올려다본다. 바로 좀 전까지 자신의 아래에서 쉼없이 들썩였던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미동없는 얼굴이다. 총기없이 깜빡이는 눈은 그저 M4의 모습만을 쫓는 듯 하다가 곧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녀의 피부는 억센 손길에 잔뜩 부르터있을 것이다. 할퀴어지고, 빨려지고, 물린 상처가 찬공기에 시릴 법도 하지만 AR 15는 고통에 몸을 숙이지도 않는다. 그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잠든 듯이 고요한 AR 15의 뺨을 어루만지고, 그녀의 분홍빛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한올한올을 손가락으로 헤아리면서, 자그마한 귓볼을 어루만졌다. 

"…하지 마."

"그럴게요."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대답한 것은 AR 15의 반응이 보고 싶어서이다. 관계가 끝난 후 맥없이 쓰러진 AR 15는 감정없는 기계와 같은 태도로 M4를 대한다. 그녀가 힘없이 쓰러져있는 모습보다는, 차라리 저항하는 모습이라도 보는 것이 좋다. 좋아. AR 15를 가지는 것은 정말 최고이지만, 사실 AR 15가 저항하는 것도 보기 좋다. 뭐든 그녀의 감정이 보였으면 좋겠다. 정립하기 힘든 양가감정에 M4는 소리없이 자조했다. 영원히 이해받지 못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안다. 저항하지 못하는 자를 찍어누르는 것이 악행이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AR 15를 놓아줄 수는 없다. 아니, 사실은 못 하는 것 뿐이다.

M4는 천천히 침대에 들어섰다. M4가 눕자마자 AR 15가 곧 등을 돌린다. 그리고는 고슴도치처럼 제 몸을 끌어안고 적대하듯이 가시를 세웠다. 가끔은 말 한마디보다 작은 행동 하나가 더 큰 의사를 대변하기도 한다. 가장 하고싶은 말을 제 안에 품으면서, M4가 손을 뻗었다. AR 15의 맨허리를 꼭 끌어안고 그 뒷목에 제 입을 맞췄다. 거부하면서도 거부하지 않는 그녀가 좋다. M4의 앞에서 심란해지는 AR 15가 좋다. 자존심 강하고 유능하지만 M4 앞에서는 나약한 그녀가 좋다. 그녀는 해가 뜨면 또 별 일 없었다는 듯이 제 총기를 점검하고 있을 것이다. 수면모드가 끝나 이제 막 정신을 차리고 있는 M4를 아무렇지도 않게 쳐다보면서, 다음 지령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역시 AR 15, 난 당신을…….

"잘 자요." 

그리고, 미안해요.






- 17.09.05

'Backup - SNJS' 카테고리의 다른 글

45 & 9 & 416 - 3P  (0) 2018.09.17
로스타 - 관계의 재정의  (0) 2018.09.17
Posted by 까망베르 베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