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up - SNJS2018. 9. 17. 02:45



꾸욱꾸욱 짓누르듯 얽어매는 손길, 휘돌며 감싸듯 느려졌다 격정을 딛고 도약하는 손짓. 본능과 이성의 완벽한 통제 하에 기계와 같이 춤추는 손가락은 때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부드러웠다가도, 야수의 발톱과 같이 날카롭게 치솟아 올랐다. 계산적인 완급 조절에 흐름을 탄 몸은 자아를 잃고 풍랑에 떠밀리는 조각배가 되어 밀리면 밀리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파도를 따라 요동친다. 그 어디에도 자신의 의지는 없다. 그저 숨 죽이고 감내하는 고철 덩어리. 부자유의 피식자. 그녀가 넋을 잃고 그저 제 안을 휘젓는 힘에 맥없이 들썩거리기만 할 때에, 돌연 상대가 그 흐름을 깨트렸다. 곧게 펴져 내벽을 쓸던 손가락은 굽어진 채로 원을 그리기 시작한다. 잔뜩 젖어든 질 입구를 감싸고만 있던 손바닥이 피부를 꽉 눌렀다가, 여린 살덩이를 부드럽게 쓰다듬듯 풀어졌다. 

갑작스런 행동의 변화에 그녀의 몸이 한 차례 무너졌다. 몸을 지탱하던 다리가 바들거리며 떨리고, 자연스럽게 허리가 굽었다.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온 몸을 물듯이듯 차올라오는 뜨겁고 느린 물살. 척추가 불거져나온 맨 몸을 힘없이 내맡기며, 그녀가 내내 참아왔던 한숨을 내뱉었다. 마치 신호탄과도 같았다. 한 번 숨을 뱉는 것만으로 그녀는 간신히 참아왔던 감각에 전신을 먹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쉬이, 숨 들이마셔요. 입술 깨물지 말고."

"…시끄러워."

기껏 찾아온 배려를 쳐냈기 때문인가? 상대가 재게 놀리던 손을 멈췄다.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희미한 바람소리가 울렸다. 기분이 편치 않은 모양이네. 남 일 생각하듯 하며,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상대와 셀 수 없이 몸을 섞었기 때문인지 그녀는 이제 상대의 숨소리만 듣고도 그 기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 좀 볼래요, AR 15?"

"……." 

"…왜 굳이 힘든 길로 들어가는 거예요?"

"……."

침묵으로 일관하자 상대가 자비없이 그녀, AR 15의 목을 틀어잡았다. 그리고 손아귀 힘으로 그 목을 조이며 강제로 고개를 들어올린다. 어차피 저항없이 이끌려 갈 거면서. 스스로 자조하며 눈을 뜨고 AR 15는 온전히 제 상대를 마주했다. M4, AR 소대의 리더. 부드럽고 무른 것 같지만 사실 M4A1의 안에는 잠재된 흉포성이 있다는 것을 안다. 때로 지배자와 같이 군림하는, 제 목줄을 쥔 인형. M4가 AR 15를 흝는다. 냉막하게 식은 눈으로 관찰하듯 온몸을 쓸어내렸다가, 종착역에 이르러 다시 AR 15의 얼굴로 돌아왔다.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잔정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 그 시선은 사실 AR 15만이 알고있는 M4의 이면이다. 잔뜩 흥분해 짓쳐들어와 저를 마구 범하는 M4, 목을 조른 채 알 수 없는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M4, 그녀의 모든 의지와 자긍심을 흙발로 짓밟고 유린하는 지배자 M4, M4, M4.

…M4, 난 네가……

"…할 만큼, 하…, 했잖아." 

실제로 그랬다. 또 어디에서 기분이 상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상처받은 얼굴로 제 방문을 두드렸던 M4를 기억한다. M4는 정오 즈음에 찾아와선 가타부타 한마디 말도 없이 AR 15을 밀쳤다. 그렇게 침대 위에 힘없이 쓰러진 채로 성난 손길에 따라 제 몸을 비트는동안 어느 새 해가 져버렸다. 한 번 불이 붙은 M4는 말릴 수도 없고 애원을 해도 듣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이 정도로 이유없이 상대를 몰아붙이는 성미는 아니었다. 정말 노리개가 된 것과 같아서, AR 15는 잔뜩 상한 목으로 결국 힘없이 말을 뱉었다. 되도록이면 이런 아쉬운 소리 같은 거 하고싶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는데.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아. 

M4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 웃지 않았다. 입꼬리는 미소 짓듯 올라갔지만 그 눈은 차갑기만 하다. AR 15는 가끔 M4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주로 지금과 같은, 이런 눈으로 자신을 응시할 때. M4의 한 손은 제 숨통을 틀어잡고 있지만 나머지 한 손은 여전히 AR 15의 안을 헤집고 있다. 잠시간의 휴식은 꿈이었다는 것처럼, 곧이어 M4의 손가락이 다시 AR 15의 안을 짓뭉개기 시작했다. 성난 들소처럼 직선으로 크게 곧게 솟구쳐 올랐다가, 뱀의 꼬릿짓처럼 매끄럽게 아래로 흘러내린다. 잔뜩 긴장해 요동치는 AR 15의 섬세하고 정밀한 인공피부, 숨 가쁘게 떨리는 근육과 솟아오른 힘줄들, 뼛대를 음미하면서. 잠깐 쉬었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는 지도 모른다. 밀려나갔던 파도가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물살과 함께 닥쳐들어온다. AR 15는 제 떨리는 몸이 곧 난파당해 휩쓸려 날아갈 것을 직감했다. 발끝부터 종아리, 허벅지, 둔부와 허리,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모든 신체가 불에 달궈진 것처럼 뜨거워졌다. 아, 아. 그녀의 가장 깊은 안에서 또아리를 튼 뱀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그 몸을 활짝 펼치고, 샛노란 눈을 번뜩이며 제 입을 벌린다. 그리고는 그 날카로운 독니로,

"…아, 흣…!" 

"신기하지 않아요, AR 15? 왜 인간은 인형에게 이런 감각을 준 걸까요."

"…하, 아……뭐, 읏……."

"진짜 같은 피부, 이 온기, 촉감들. AR 15는 알아요? AR 15의 안……."

박차를 가하는 손짓과는 달리, M4가 읊조리듯 나지막한 어조로 속삭였다.

"…정말 좋아요." 

AR 15의 귀로 그 목소리는 분명히 흘러들어갔지만, 그녀는 그 말에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잔뜩 억눌려진 신음과 비명을 단말마처럼 내뱉은 후, M4의 품으로 맥없이 고꾸라지고 있었으니까. M4가 제 품 안에서 경련하는 가련한 이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즐겁지만은 않은 웃음이 그 입가에서 줄줄 새어나온다. 마치 비웃는 것도 같은 씁쓸한 잔웃음을 흘리면서 M4가 입을 열었다.

"쉬어요." 







*






M4는 거칠게 손바닥을 비볐다. 손가락을 뽑아 없애버릴 듯이 강렬하게 씻어내리면서, 제 손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를 털어냈다. 아직도 잔향이 남아있는 것만 같다. 깨끗하게 씻어 없앤 AR 15의 향. 손바닥을 펴 제 코 밑에 댄다. 크게 숨을 들이마쉰다. 깔끔한 비누향이 났다. 힘없이 웃으면서 문고리를 잡아돌렸다. 어둑어둑한 묵빛 방이 보인다. 희미하게 새어드는 달빛 아래로 잔뜩 흐트러진 이불과 침대가 드러난다. AR 15의 자켓과 원피스가 침대 밑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옷을 주워 적당히 개켜놓았다. 주인을 닮아 삭막한 방이라 옷가지를 걸어놓을 가구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서늘한 찬기운이 든다. M4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침대 옆에 소리없이 걸터앉아 난잡하게 흐트러진 이불을 손에 쥐었다. 아무렇게나 쓰러져있는 AR 15가 멍한 눈으로 M4를 올려다본다. 바로 좀 전까지 자신의 아래에서 쉼없이 들썩였던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미동없는 얼굴이다. 총기없이 깜빡이는 눈은 그저 M4의 모습만을 쫓는 듯 하다가 곧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녀의 피부는 억센 손길에 잔뜩 부르터있을 것이다. 할퀴어지고, 빨려지고, 물린 상처가 찬공기에 시릴 법도 하지만 AR 15는 고통에 몸을 숙이지도 않는다. 그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잠든 듯이 고요한 AR 15의 뺨을 어루만지고, 그녀의 분홍빛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한올한올을 손가락으로 헤아리면서, 자그마한 귓볼을 어루만졌다. 

"…하지 마."

"그럴게요."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대답한 것은 AR 15의 반응이 보고 싶어서이다. 관계가 끝난 후 맥없이 쓰러진 AR 15는 감정없는 기계와 같은 태도로 M4를 대한다. 그녀가 힘없이 쓰러져있는 모습보다는, 차라리 저항하는 모습이라도 보는 것이 좋다. 좋아. AR 15를 가지는 것은 정말 최고이지만, 사실 AR 15가 저항하는 것도 보기 좋다. 뭐든 그녀의 감정이 보였으면 좋겠다. 정립하기 힘든 양가감정에 M4는 소리없이 자조했다. 영원히 이해받지 못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안다. 저항하지 못하는 자를 찍어누르는 것이 악행이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AR 15를 놓아줄 수는 없다. 아니, 사실은 못 하는 것 뿐이다.

M4는 천천히 침대에 들어섰다. M4가 눕자마자 AR 15가 곧 등을 돌린다. 그리고는 고슴도치처럼 제 몸을 끌어안고 적대하듯이 가시를 세웠다. 가끔은 말 한마디보다 작은 행동 하나가 더 큰 의사를 대변하기도 한다. 가장 하고싶은 말을 제 안에 품으면서, M4가 손을 뻗었다. AR 15의 맨허리를 꼭 끌어안고 그 뒷목에 제 입을 맞췄다. 거부하면서도 거부하지 않는 그녀가 좋다. M4의 앞에서 심란해지는 AR 15가 좋다. 자존심 강하고 유능하지만 M4 앞에서는 나약한 그녀가 좋다. 그녀는 해가 뜨면 또 별 일 없었다는 듯이 제 총기를 점검하고 있을 것이다. 수면모드가 끝나 이제 막 정신을 차리고 있는 M4를 아무렇지도 않게 쳐다보면서, 다음 지령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역시 AR 15, 난 당신을…….

"잘 자요." 

그리고, 미안해요.






- 17.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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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망베르 베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