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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0.08 (파이어엠블렘 풍화설월) 에델레스 - 호감
Backup - FE3H2019. 10. 8. 23:52

사랑의 4단계,

2. 호감

 

 

 

 

 

 

 

 

햇살이 창창한 가운데 소복하게 쌓인 간식과 감미로운 향이 감도는 테이블. 이제는 익숙해질 만한 다과회이나 몇 번이고 환영할 만한 즐거운 초대에 절로 피어오르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다. 부드럽게 풀어진 자세로, 그러나 결코 귀족적인 예절을 잊지 않으면서, 에델가르트는 베르가모트 티를 한모금 머금었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벨레스가 제 몫의 차를 따라내리는 모습을 응시하면서,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는다. 접시에 부딪치는 소리조차 없이 매끄럽게 찻잔이 자리를 잡는다.

벨레스는 분명 귀족은 아니었으나 차를 즐기는 법을 알고있었다. 또한 대화 상대로서도 손색이 없어, 몇 번인가 에델가르트는 벨레스가 다과회를 제의해주기를 제 쪽에서 기다린 적도 있었다. 

차를 마시던 벨레스와 눈이 맞닿는다. 눈이 닿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입가와 부드럽게 내리감기는 눈꼬리. 소리없이 피어나는 웃음을 띄우는 선생님의 모습. 에델가르트는 놀라 눈길을 흩뿌리고 제 찻잔 위에 급히 손을 올리면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향을 들이켰다. 익숙한 베르가모트 향기가 겨우 마음을 안정시키면, 진정된 목소리를 유지하려 노력하면서 천천히 입을 연다.

"선생님, 요즘 꽤 자주 웃게 된 것 같아."

몇 개월 간 표정 없는 담담한 얼굴만을 마주한 끝에 처음 선생님의 그 웃는 얼굴을 보게 됐을 때. 그 웃음을 눈에 담았을 때 에델가르트는 이 순간, 이 웃음, 이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을 깨달았다. 각인처럼 남아 시간이 흐르고 세월에 무너져도 그 희미하고 흐릿한 미소는 영원히 뇌리에 남을 것이라고. 에델가르트는 벨레스의 끝없이 삭막한 낯에서도 종종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은 옅은 감정의 편린을 엿보고는 했다. 마침내 막이 한꺼풀 벗겨진 것 같은 선생님의 첫 웃음이 그 정적을 깨트렸을 때, 에델가르트는 제 가슴을 부수고 텅 빈 속을 채우며 흘러갈 마음을 깨달았다. 평생을 깊이 새겨져 지워지지 않을 그 익숙하지 않은 감정. 슬픔보다 장대하고 분노보다 짙으며, 언제고 저를 흔들어 부술 수 있는 감정.       

"…에델가르트도."

"내가?" 

"베르가모트 티를 마실 때면, 항상 웃고있다." 

물론 그렇겠지 선생님. 당신과 같이 있을 때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니까. 힘없히 속마음을 집어삼키고 부드럽게 침음을 흘리면서, 에델가르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이 아무리 떫은 차를 권하더라도 내가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이 향기가 좋아."

"그런 것 같다. 그러고보니, 보드 게임을 좋아한다고 들었어."

"…보드 게임? 갑자기? 좋아하기는 하는데……."

설마하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벨레스가 허리를 숙여 티 테이블 아래로 몸을 옮긴다. 에델가르트는 놀라 눈을 깜빡이면서 벨레스가 테이블 아래에서 독특한 선물 상자를 꺼내드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에델가르트가 기억하기에, 저번주는 깜짝 선물로 곰인형이 등장했고. 그 전주에는 카네이션이 있었으며, 또 그 전에는…….

"선생님, 도대체."

"받아줬으면 한다. 선물이야."

어안이 벙벙한 채 벨레스에게서 상자를 넘겨받으면서, 에델가르트는 반사적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돌려줬다. 매 다과회마다 선물을 안겨주는 터에 이제 슬슬 적응이 될 법도 한데. 벨레스가 제 반응을 기대하듯 관심 깊은 눈빛으로 저를 응시하는 순간순간마다 에델가르트는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선물을 넘겨받을 때마다 몸을 움츠리거나 손을 떨지 않는 것이 결국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풀어봐도 될까?"

벨레스가 기대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선물을 받는 것은 에델가르트 자신인데, 이 순간을 가장 기대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니라 꼭 선생님인 것 같았다. 벨레스를 의식하면서 조심스레 포장을 풀어헤치고, 상자를 개봉하면서 에델가르트는 곧 탄성을 흘렸다.

깔끔하게 조각된 나무 말들과 매끈한 체스판이 상자 안에 꽉 들어찬 채 저를 맞는다. 에델가르트는 이미 원목으로 된 대형 체스 테이블과 대리석을 깎아만든 호화로운 체스말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눈 앞에서 덜걱 거리는 이 작은 선물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은 무가치한 나무 토막으로 전락할 뿐이었다.   

"…정말 고마워, 선생님."

에델가르트가 체스판에서 눈을 떼어내지 못하며 다시 한 번 인사를 전하자, 벨레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는다. 이전의 에델가르트였다면 자연스레 그 손을 피했을 것이다. 벨레스의 손이 제 손을 자연스럽게 덮는다. 에델가르트가 담담한 기색을 가장하는 동안, 벨레스는 에델가르트의 손을 포갠 채 그 아래에서 반쯤 열려있던 상자를 완전하게 들춰냈다. 

"한 번 해볼래?"

"……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에델가르트는 제게서 멀어지는 벨레스의 손을 그저 눈으로 쫓았다. 손등 위를 스쳐갔던 따스한 온기를 그리듯 눈을 깜빡인다. 그 잠깐 새에 벨레스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체스판을 세팅하며 말을 올려 세우고 있었다. 황녀의 앞에 백색의 유닛이 늘어서고, 반대편에는 자연스럽게 흑색의 말이 진을 친다. 

에델가르트는 정중앙의 폰을 집어들면서 조심스레 턱을 괴었다. 선생님과 체스를 두는 것은 처음이며 상대의 실력을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여태까지 관찰해온 바에 의하면 벨레스는 상식이 조금 모자란 듯 싶다가도 전략과 전술엔 매우 해박한 사람이었다. 진지하게 임해야 할 것이다.    

에델가르트가 선수를 끊자 벨레스가 자연스레 뒤를 이어받는다. 백말과 흑말이 순서를 교차하며 나무판 위에서 마주 서 그림을 그리고, 기물이 체스판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간간히 정적을 부술 뿐이다. 시선을 집중한 채 눈으로 상대의 말을 쫓는다. 폰들이 칼을 겨눈 채 서로 늘어서고, 나이트와 비숍이 칸을 뛰어넘고 고개를 내밀며 상대를 위협하기 위해 포진한다. 어느 정도 교착 상태가 형성되고 벨레스의 나이트가 에델가르트의 비숍을 위협하기 시작하자, 에델가르트는 작은 침음을 흘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전체 판을 내려다보며 잠시간 고민해보았지만 취할 수 있는 수는 두가지 뿐이다. 물러서거나, 맞서싸워 서로의 말을 교환하는 것. 에델가르트는 두어 번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마침내 비숍을 들어 벨레스의 나이트를 쓰러뜨렸다. 바로 다음 순간 뒤에 자리 잡았던 벨레스의 폰이 에델가르트의 비숍을 넘어뜨린다. 준비하고 있던 에델가르트가 쓰러진 기물들을 판 밖으로 옮겨내는동안, 벨레스의 숨 죽인 작은 웃음 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에델가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벨레스를 들여다보았다. 즐거운 기운을 띄운 벨레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붙여오며 미소 짓는다.

"……선생님?"

"마치 카스파르 같았다." 

"카스파르, 내가?"

"걸려온 싸움은 피하지 않지."

"……체스는 원래 그런 게임이야. 희생으로 대가를 쟁취하는."

에델가르트가 응수하자, 벨레스가 잡고있던 기물에서 손가락을 떼어내면서 눈짓을 한다. 에델가르트는 다음 수를 위해 자연스레 손을 뻗으며 벨레스의 부드럽게 말려올라간 입꼬리를 훑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웃음기를 감추지도 않은 채 그저 에델가르트를 잔잔하게 응시한다. 속 깊은 곳이 간질거리고, 벨레스의 눈길이 닿는 모든 부분에 기분 좋은 소름이 오르는 듯한 감각. 에델가르트는 작게 기침하면서 서둘러 말을 내려놓았다. 

"내 비숍이 카스파르라면, 이건 어때?"

에델가르트의 새하얀 나이트가 폰들 사이로 당당하게 고개를 내민다. 부끄러운 구석 하나없이 담대하게 나선 나이트는 벨레스에게 도전하듯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그러자 에델가르트의 얼굴과 나이트를 오가던 벨레스의 눈이 답을 찾는 듯 생각에 잠긴다.

"…흠, 페르디난트?"

"페르디난트? 내 나이트가?"

듣고보니 물러서지 않고 귀족적인 자태를 자랑하는 것이 조금 닮은 것도 같다. 에델가르트는 맑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건?"

"룩? 여태껏 한 번도 움직이질 않았지. 베르나데타가 떠오른다."

"움직이지 않아서 베르나데타인 거야?"

엉뚱한 발상이지만 벨레스의 말은 묘하게 얼맞는 구석이 있었다. 에델가르트는 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에 잔웃음을 뱉으며 즐거운 콧소리를 흘렸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말마다 도로테아, 페트라, 린하르트, 휴베르트의 이름이 뒤를 이어 따라붙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명되지 않은 두 개의 말, 퀸과 킹이 남았을 때. 

에델가르트는 제 퀸을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려세우며 벨레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선생님. 이건 내가 말하고 싶은데, 선생님은 나의 퀸이야."

말을 끝맺자마자, 에델가르트는 조심스레 제 입안의 속살을 깨물었다. 즐거운 기분에 저도 모르게 말을 뱉었지만. 자신을 너무 보여주지는 않았나. 꾹꾹 눌러 담아두고 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새어나가지 않았나. 에델가르트가 불안에 잠겨 조심스레 벨레스의 눈치를 보는동안, 벨레스는 눈을 크게 뜨는가싶더니 곧 천천히 내리감으며 바람과도 같은 웃음을 뱉는다. 

"영광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림처럼 떠오르는 그 맑은 미소란. 진정된 듯 싶었던 심장이 덜컥거리며 튀어오르고, 에델가르트는 그저 마른침을 삼키며 더듬더듬 손을 뻗어 제 옆의 찻잔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차를 들이마시며 벨레스의 눈을 피하고, 행복한 기운이 번져가는 고동을 무시하면서. 찻잔을 내려놓을 즈음엔 어떻게든 눈을 돌리지 않을 여유가 생겨서, 에델가르트는 떨리는 시선으로 그저 제 선생님의 웃음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본다.

"……나도 말해야겠는데."  

"…응?"

"에델가르트."

무슨 말을 하려기에 이리 뜸을 들이는가. 에델가르트는 벨레스의 웃음기 어린, 그러나 그 진지한 낯에 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 응답했다.

"듣고있어, 선생님."

"……너는 내 킹이다."

고저없이 담담한 목소리가 선언하듯 떨어지며 테이블 위로 쏟아져내린다. 에델가르트가 잠시간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침묵을 유지하는동안, 벨레스는 조심스레 눈썹을 찌푸리면서 에델가르트의 눈을 넌지시 쳐다봤다. 마치 제 눈치를 살피는 듯한 선생님의 그 움직임에 내심 놀라는 것도 잠시. 에델가르트는 점차 제 안에서 퍼져나가는 그 의미를 깨닫고 소리없이 입을 벌렸다.   

"……킹……."

"너는 내가 가장 아끼는 학생이다."

"…그, 그래, 선생님……."

"반드시 지켜야하는."

벨레스는 답지 않게 조금 조급한 어조로 뒷말을 덧붙이면서 테이블을 두드렸다. 에델가르트의 멍한, 그러나 잔뜩 달아오른 붉은 얼굴이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제 안에서 널을 뛰는 부끄러움과 기쁨에 작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가장 아끼는, 가장 아끼는 학생. 킹. 벨레스의 목소리가 남아 에델가르트의 귓가에서 멤돌기 시작한다. 에델가르트는 결국 지금 이 순간도 영원히 잊지 못할 빛나는 조각이 될 것이며, 긴 시간이 지난 후에도 제 안에 남아 흘러갈 것을 깨달았다. 

끝끝내 짊어지고 서야할 짐과, 눈을 돌리지 않고 맞서싸워야 할 앞이 보이지 않는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언젠가 이 짧은 기억은 그림자를 거두는 빛이 되어 부유하겠지. 그저 이 순간이 조금, 모래처럼 흩어져 나갈 잠시라도 좋으니, 조금만 더 오래 지속될 수 있기를. 곧 황녀는 다시 가면을 찾아 써야할 테지만, 이 작은 테이블 위, 선생님과 함께하는 순간만은 그저 에델가르트로 남아 웃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중한 순간은 조금이라도 놓칠 수 없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어 제 선생님을 올려다보면서, 에델가르트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되돌려줬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킹으로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어." 

언젠가 당신과 맞서야 할 그 순간까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어떤 마음으로 뱉어낸 말인지 선생님은 끝까지 이해할 수 없겠지. 제 마음을 찢어내는 말의 무게를 되새기며, 에델가르트는 다시금 차게 식어내린 베르가모트 차를 머금었다. 

 

 

 

 

 

 

 

- 19.10.8 

Posted by 까망베르 베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