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의 장 스포가 있습니다. 1부 2월까지 클리어 하지 않으신 분은 조심! 중대 스포가 될 수 있습니다.
*후반부 약수위 주의
사랑의 4단계,
4. 상애(相愛)
에델가르트만이 이 순간이 올 것을 알았다. 찬란하고 새하얀 평화는 결국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뿐이며 어두운 그림자 밑에서 준동하는 음모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한때나마 제 알량한 꿈에 기대어 벨레스와 함께 걸을 수 있기를 기도했으나, 크로니예가 제랄트를 살해한 순간부터 에델가르트는 희망을 버렸다. 그 모든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변명한들 그림자와 손을 잡은 제가 깨끗해질 수는 없다. 에델가르트의 길은 이미 피와 그림자로 얼룩졌으며 그 어둠은 갈수록 짙어져만 갈 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더러운 손으로 저와 함께 해달라 묻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지 그저 자조할 따름이다.
황제는 망설이지 않는다. 느리게 눈을 내리감고, 천년의 역사 속에 잠들었던 먼지와 낡은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신다. 이 낡고 공허한 무덤들은 결국 인간의 고혈과 슬픔을 토대로 자리 매김한 기만이며, 그릇된 체제의 온상이다.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져 새로운 땅의 밑거름이 되어야 할 늙고 병든 교만함. 숨결과 함께 고루한 먼지와 부유하는 날 선 적의를 들이마시면서, 에델가르트는 제 선택을 마주한다. 뒷걸음질 치지 않고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그저 한걸음, 한걸음 걸어나가면서, 매 걸음마다 품어왔던 미련들을 차츰차츰 떨쳐보낸다. 족적을 남기며 따라붙는 검은 그림자들을 지르밟아 흐트러뜨리고 잿물처럼 흘러내리는 회한과 슬픔을 뒤로 하면서.
"신속하게 문장석을 회수해라. 저항하는 자는…… 죽여도 상관없다."
황제는 후회하지 않는다. 낯선 시선들 너머로 혼란으로 물든 익숙한 얼굴이 닿았다. 에델가르트는 제 맨얼굴을 응시하는 옛 선생의 모습에서 익숙한 혼돈을 보았다. 한때 황녀였던 자가 품었었던 그 익숙한 혼돈. 누구 하나 길을 가르쳐주지 않는,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절망과 어리석은 희망으로 뒤엉켜있는 현실에 고뇌하는 얼굴. 선생님, 당신이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니 기뻐. 여지껏 한결의 의심 없이 그저 나를 성실한 학생으로서 믿어줬다는 뜻이겠지. 지금 이 상황에서도 당신의 눈빛엔 결단의 기색이 보이지 않아.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더욱 냉철해질 수 밖에 없어. 나는 당신이 알던 학생이 아니라 당신이 적대해야 할 사람이니까. 에델가르트는 이미 미련을 버렸다. 제 도끼를 쥔 손을 앞으로 들어 올려 진군의 명령을 내리면서, 차가운 눈으로 과거의 동료들을 무감정하게 돌아본다. 실로 그녀가 감내하고 있는 것이 이토록 통렬하고 애석한 슬픔일지라도 단 한 톨의 감정도 내비쳐서는 안되겠지.
문장석을 향해 제국군들이 달려들며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고, 이에 맞서 흑수리반 역시 혼란스레 맞대응을 취한다. 무기를 휘두르는 그들은 납득되지 않는 불합리함과 믿지 못할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 얼굴을 잔뜩 찌푸렸지만 결코 칼을 물리지는 않았다. 벨레스의 일사불란한 지도 아래 체계적으로 대열을 맞춰 성묘를 방어하는 그 움직임들에 말없이 찬사를 삼키며, 황제는 뒤이어 마수들을 진군시킨다. 에델가르트 역시 흑수리반의 일원이었다. 저들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움직이는지, 선생님의 지시 하에 어찌나 조직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내심으로는 그들이 저항하지 않고 그저 방관하기를 바랐지만 그런 기대와는 별개로 준비를 서툴리 하지는 않았다.
"에델가르트!"
석실을 울리며 귓가를 때리는 그 고통 어린 표효를 외면한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페르디난트가 어떻게든 제 주의를 끌어보려는 것처럼 연이어 고함을 내지르고, 베르나데타가 울 듯한 얼굴로 앞을 막아선 병사와 에델가르트를 쳐다보며 비명을 흘린다. 페트라는 강하게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색으로 전장에 뛰어들었고, 카스파르는 주저하는 자신을 호통치는 것처럼 평소보다 더 큰 고함을 내지르며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앞에 서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리며 모두를 이끄는 벨레스가, 에델가르트의 옛 선생님이 있다. 에델가르트는 피하지 않고 그 떨리는 녹빛 시선과 눈을 맞췄다. 교회의 족속들처럼 눈과 머리색이 변해버린 그 전 용병. 누구보다 믿음직스럽고 강인하던,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을 아리게 하던 나의 선생님. 언제고 이 순간을 직감했는지도 몰라. 당신은 내가 맞서야 할 가장 큰 벽이 되리라고.
스쳐가는 것처럼 짧은 순간이었지만 에델가르트와 벨레스는 서로의 눈 속에서 깊은 절망과 탄식을 읽었다. 미련과 감정을 모두 털어냈다고 생각했지만, 벨레스를 마주하는 순간 제 안에서 터져나오는 절규는 어떻게 해도 감춰낼 수가 없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게 최선이었다고 입술을 짓씹으면서, 에델가르트는 앞으로 나선다. 도끼와 방패를 들어 벨레스를 겨누고 그 에메랄드 빛의 눈을 마주한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베이고 살갗이 도려내지는 것만 같은 아픈 눈. 에델가르트를 따스하게 품었던 밤바다의 눈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색이 완전하게 변해 버렸어도 선생님이 가졌던 위안과 따뜻함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보라. 지금 이 순간 그 눈 속에 담긴 것은 나이 어린 학생 에델가르트가 아니라, 적의와 살의를 품어야 할 대상, 염제다. 하지만 선생님, 왜 당신의 눈에서는 그런 감정이 보이지 않는 걸까. 받아 마땅할 살의와, 경계와, 적의와, 분노가 느껴지질 않아. 당신의 생각을 읽는데는 늘 서툴렀지. 어쩌면 내 남은 미련이 여즉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하지만 선생님, 당신은 달랐어. 누구보다도 빠르게 나를 알았고, 이해할 수 있었지. 선생님은…… 지금 내게서 무언가를 읽고있을까?
당신을 볼 때마다 터져올라오는 내 설움과, 열망과, 울분을 읽고있을까? 당신이 나를 붙잡고, 손을 잡아서, 그 두 팔로 다시 나를 끌어안고 이전과 같이 웃을 수 있게 해줬으면 하는 이 마음을? 그동안 당신과 걸어왔던 모든 걸음걸이가 한치의 흔들림 없는 내 진심이었음을. 당신을 아끼고 귀애하던 내 모든 말과 행동이 허상이 아니었음을, 그 모든 것을 토로하고 싶어 언제든 당신을 붙잡고싶었던 내가 있었음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결코 당신에게 닿지 않기를 바라. 모든 걸 내뱉으며 절규하고싶어 혀를 깨물고 눈을 피하는 나를. 상해버린, 메어오는 가슴과 어지러이 휘몰아치는 내 깊은 울분을, 심장을 잡아쥐어 으깨어 부수는 듯한 슬픔과, 당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죄책감 속에 말이 되지 못하는 내 마음들이 닿지 않기를 바라. 그 모든 감정의 실타래와 거미줄처럼 얽어매인 끝없는 토로의 비명을 절망 서린 한숨에 담아서, 오로지 짧은 인사를 건넨다.
"……선생님, 그간 정말 고마웠어. 그리고……아냐, 그만하자."
더 이상 말을 뱉어서는 안된다. 무엇이든 결국 비명과 고함이 되어 터져나올 테니까. 타오르는 제 잿빛 마음을 죽이고, 그 넘실대는 과분한 사랑을 어떻게든 삭여야 하니까. 할 수 있는 전부를 다해 벨레스에게서 눈을 돌리고 외면한다. 에델가르트가 택한 길은 그런 길이었다.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도 포기해야 하는 장엄한 각오와 비참할 정도의 인내를 요하는 길.
황제는 무너지지 않는다. 입술 새로 새어나오는 신음과 질척한 소망을 모두 제 안에 묻고, 굳건히 선 채 고개만 끄덕여 병사를 돌진시킨다. 그러나 제게 짓쳐들어오는 기사단들을 베어 넘겨가면서 차근차근 앞으로 전진해오는 벨레스의 발걸음은 멈춰서지 않는다. 그 무엇보다 잘 알고있었다. 천제의 검을 든 벨레스를 일반 병사들 정도로 막아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은 직접 손을 쓸 수 밖에 없다고, 그 익숙한 얼굴과 칼날을 향해 제 도끼를 휘두를 수 밖에 없다고.
코 앞까지 닥쳐든 천제의 검이 낭창하게 휘어지며 방패 위를 두드린다. 에델가르트는 이를 악 물며 검 끝을 쳐내고 뒤이어 내리꽂히는 벨레스의 시선에 한차례 몸을 떨었다. 에델가르트를 말없이 응시해오는 그 짙은 시선은 제 속내를 파헤치듯 붙잡아매고, 가슴을 옥죄며 조여들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좀먹는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에델가르트가 시선을 피한다. 무기를 쥐고있던 손에 힘을 주며 마른침을 삼키고, 뒤이어 도끼를 세워 벨레스를 향해 겨눈다.
황제는 물러서지 않는다. 박차를 가해 벨레스를 향해 달려들면서 에델가르트가 도끼를 내리찍는다. 기다렸다는 듯 벨레스의 검이 익숙하게 황제의 도끼를 받아내고, 날을 타고 흘러내려간 검이 부드럽게 휘어져 에델가르트의 손목을 긁어내린다. 얕은 상처를 무시하며 뒤이어 방패를 휘둘러 벨레스의 몸을 빼게 하고, 에델가르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횡으로 크게 도끼를 휘둘렀다. 사뿐히 공격을 피한 벨레스가 몸을 길게 뻗으며 작살과 같은 찌르기를 가하면 에델가르트는 뛰듯이 옆으로 비켜난다. 한 번 한 번의 모든 공격과 방어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뻗어나가면서, 에델가르트는 이 익숙한 기시감에 이를 악 물었다. 몇 번이고 같이 날을 섞었던 대련의 기억들이 둘 사이의 모든 공격에 어우러져 흩뿌려지고 있었다.
익숙하게 닥쳐오는 공격과 연계기들을 상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읽어 받아쳐내면, 마찬가지로 벨레스 역시 에델가르트의 모든 공격을 짐작하고 피해낸다. 손을 뻗으면 당장이라도 잡을 수 있을 듯한 벨레스의 옷자락과 에메랄드빛 머리칼이 제 시선을 빼앗으며 흩날린다. 칼날과 피의 사이에서 피어나는 그 모든 둘의 시간들, 같이 나눴던 무기만큼이나 선연한 그 대화들. 달빛 아래에서의 그 소리 없던 춤과, 새어나가지 않게 간직했던 비밀스러운 키스까지. 제 눈앞에서 그 선명한 기억들이 깨져 흩날려 내린다. 슬픔, 설움, 미련, 그리고 연모의 감정을 한 번 두 번 칼을 맞댈 때마다 털어내고, 흘려내고, 베어내면서. 고통 어린 비명 대신 기합을. 절망의 눈물 대신 인고의 땀을. 회환 서린 절규 대신 침묵을 담는다.
제 작은 손에 쥐기에는 너무 과한 꿈을 꾸었던 모양이다. 제 안에서 부서져 산산히 새어나가는 빛나는 시간의 조각들에 소리없는 비명을 내지르면서, 에델가르트는 헛숨을 뱉었다. 번개처럼 저를 꿰뚫는 충격에 놀라 눈을 돌리면, 어깨를 찌른 검의 주인이 제 앞에 서있다.
"……에델가르트……."
팔을 들 수가 없다. 그러나 에델가르트는 고통으로 낮게 신음하면서도 도끼를 놓치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리면, 저를 들여다보며 동요하는 벨레스가 있다. 마치 불안해하는 것처럼, 염려하는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과 눈. 제 이름을 부르는 그 흔들리는 목소리가 저마저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 같아서 에델가르트는 잘게 몸을 떨었다.
황제를 무력화 했다고 판단한 벨레스가 뒤이어 칼을 거두고 에델가르트가 그저 무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몸을 떠는동안, 벨레스의 학생들과 기사단원이 포위진을 그리며 에델가르트를 둘러싸기 시작한다. 둘이 칼날을 섞는 새 문장석을 탈취한 병사들은 모두 후퇴하거나 처단 당했다.
"……벨레스, 에델가르트를 베세요."
가증스러운 존재 같으니. 에델가르트는 입술을 악 물며 그저 신음을 삼키고 대주교의 낯을 차갑게 쏘아봤다. 저 자, 저 존재가 포드라를 쥐고 흔들어 지금의 악순환을 자아냈다. 문장에 짓눌려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가능성들과 인간 본연의 능력들. 에델가르트가 찾는 인간의 삶과, 개개인이 모두 지니고있을 진주와 같은 매력은 교회의 기치 아래 짓밟히고 파묻혀 흙더미로 내려앉았다. 존재하지도 않는 여신의 이름 아래 반짝이는 인간의 미명을 빼앗아간 자들.
"…레아……?"
"주께선 이 반역자가 살아남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나 그 모든 제 목표만큼이나 눈길을 앗는 사람이 있다. 대주교와 꼭 닮은 에메랄드 빛, 연한 색의 눈을 제게서 떼어내지 못하는 사람, 선생님. 벨레스는 저를 죽이라는 명에 천천히 대주교를 바라봤다가, 망연히 에델가르트에게로 눈을 돌린다. 칼을 늘어뜨린 채 가만 서있는 그 모습에 절로 몸이 굳는다. 에델가르트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불안과 동요로 떨려오는, 흔들리는 눈빛 너머로 둘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순간이 바로 두 사람의 연약한 사제 관계의 마지막일 것이며 벨레스가 칼을 내치리는 순간 그들 둘 사이의 연도, 길도 결국 끊어지고 말리라고.
유일한 교착점이자 대척점의 시작에 서서 둘 중 그 누구도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벨레스가 천천히 천제의 검을 들어올리면, 에델가르트는 무너진 자세로도 당당히 고개를 들어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는다. 그 어떤 공격보다도 무겁고 진중한, 에델가르트가 평생을 괴로워 할 단 한 번의 참격이 있을 것이다. 차갑고 아리게도 가슴 깊은 곳에 남아 평생 흉으로 자리 할 칼날을 담담히 맞이하겠다. 이것이 당신에게 받는 마지막 선물이 되겠네, 선생님. 마음의 준비를 끝마친 에델가르트가 주먹을 꽉 쥐며 제게 떨어질 선고를 기다리는동안, 그러나 기이하게도 벨레스는 칼을 내리치지 않는다.
짧은 정적의 끝에 벨레스가 눈을 감는다. 대주교가 의아한 눈으로 벨레스를 재촉하고, 주변을 둘러싼 일원들이 차마 말을 꺼내지도 못한 채 조용히 침묵을 지킨다. 그들 모두는 벨레스가 얼마나 깊이 생각하는 사람인지, 말을 하지는 않으나 속에 얼마나 많은 것을 담고 있었는지 잘 알고있었다.
"……나는 에델가르트를 벨 수 없어……."
벨레스가 대주교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에델가르트는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하지 못해 그저 눈을 크게 뜬 채 벨레스를 올려다봤다. 황제와 짧게 눈을 맞춘 벨레스가 에델가르트를 모두에게서 지켜내듯이 몸을 돌려세운다. 천제의 검을 앞에 겨누고, 두 발을 단단히 딛어 제 등 너머로 에델가르트를 숨기면서. 숨이 멎는 듯한 충격으로 제 선생님의 등만 아연히 바라보면서, 에델가르트는 입술을 떨었다.
"……선생님, 지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이 순간 제가 느낀 환희와 감격은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온몸을 때리며 퍼져나가는 안도와 기쁨에 어찌 할 바 없이 그저 몸을 떨면서 에델가르트는 입을 닫았다. 벨레스는 제가 어떤 존재이든 관계없이 그저 에델가르트를 택했다.
***
선생님과 자신을 따라 걷기를 선택한 친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들의 본의가 무엇이었든 모두들 에델가르트와 같은 길을 걷기를 택했고, 진정 에델가르트는 그들 모두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벨레스가 자신을 택했기에 뒤따른 결과라는 것을 알았으나 실로 큰 안도감에 스스로도 실감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에델가르트는 휴베르트를 통해 각지의 제후들에게 격문을 띄우고, 남 몰래 조용히 벨레스를 찾았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단 둘이, 조용하게. 에델가르트는 임시로 지어진 캠프의 제 침소 안에 벨레스를 들이고 팔을 끌어안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저를 선택한 이후로부터 꼭 하지 않으면 안될 말들이 있었다. 그것은 나약한 제 감정의 토로이기도 하나 또한 기쁨과 경애의 감사 인사이기도 했다. 나직하게 제 기쁨과 감격을 전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저를 파고드는 불안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에델가르트는 차분히 숨을 가다듬었다.
"……나는 불안해, 선생님. 불안에 짓눌릴 것 같아."
지금도 바깥에서는 병사들이 칼날을 가다듬으며 행군의 준비를 하고있었다. 에델가르트의 명령 한 마디면 이 모든 군사들이 대수도원으로 향해 그 오래된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달려들 것이며, 웃으며 인사하던 옛 선생과 친우들을 죽이기 위해 화살을 쏘아낼 것이다. 대수도원의 모든 이를 죽이고 불태우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전쟁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이를 쳐죽이고, 마주하는 벽은 모조리 무너뜨려 제가 발딛고 선 땅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는 불길. 누가 알겠는가, 종내엔 저 자신마저 불 태울지도 모르지.
"……그래서, 되돌리고 싶나?"
"아니. 그러고 싶지도 않고, 여기까지 와서 그럴 수도 없어. 나는 이미 이 길을 선택 했으니까."
하지만 선생님. 부드럽게 웃음짓고 서있는 벨레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에델가르트는 마침내 한마디를 뱉었다.
"당신은 나와는 달리 아직 돌아갈 길이 있어. 그래도 정말, 나와 함께 하겠다는 거야?
정말 삼켜내고 묻어버리고 싶은 말 중 하나였으나 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벨레스가 걸어갈 길은 이 길이 아닐 수도 있었다. 에델가르트 스스로가 얼마나 바라고 소원하고 기뻐했든 간에, 이 길과 제가 선생님에게 걸맞는 것인가 하는 물음은 끝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백 번, 천 번을 생각해봐도 에델가르트는 스스로가 바라는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리 나약하게도 제 선생님의 답을 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벨레스가 희미하게 웃음 짓는다. 턱을 쓸어내리며 고민하는 듯한 기색이었으나, 그 만면에 내려앉은 웃음기는 결코 거둬지지를 않는다. 제 행동에 한 점의 후회조차 느낄 수 없어 부드럽게 휘어진 입꼬리. 벨레스는 그저 단호한 의지로 선언한다.
"이게 내가 선택한 길이다, 에델가르트. 너와 함께 걷는 길."
에델가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존재는 언제고 내 위안이고 평온이었으니. 그 선택에 기뻐하며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만이 에델가르트가 돌려줄 수 있는 최대의 감사 인사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선생님, 우리가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을 거야. 준비가 되면 바로 가르그 마크로 진격할 예정이니까, 무엇이든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도 좋아. 내가 답할 수 있는만큼은 답하겠어."
더 이상 뒤로 물러나거나 간격을 잴 이유가 없다. 에델가르트는 제 손바닥을 내보였다. 여전히 숨기고 싶은, 감춰두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으나 이제 벨레스는 그 모든 것을 묻고 알아낼 권리가 있었다. 저를 선택한 이를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는 없는 법이다. 당신이 누려 마땅한 것이니 가져가라고, 어떤 질문이 오든 담담하게 대답할 준비를 하며 에델가르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둠 속에서 꿈틀대는 자들, 솔론과 크로니예, 탈로스 같은 자들에 대해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혀왔지만.
"……하나가 있긴 하다."
"……듣고있어."
그들이 당신의 원수인 것은 자명하지만 나로서는 그 힘이 필요하다고. 자신도 그들을 증오하고 경멸한다는 허무한 답변밖에 돌려줄 수가 없다. 벨레스의 눈빛과 표정에 위축되면서도 에델가르트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벨레스는 망설이는 듯 약하게 고개를 기울였다가, 곧이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아직도 악몽을 꾸고있나?"
"……아, 뭐라고……?"
생각지 못한 질문. 에델가르트는 그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내용이 아니라 저도 모르는 새 반문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벨레스는 천천히 고개를 바로 하더니 이내 에델가르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재차 입을 연다.
"아직도 악몽을 꾸고있나?"
"……선생님, 말을 못 들은 게 아니야. 이해가 안 가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지 않아……?"
"……궁금한 건 이것 뿐이다."
에델가르트는 몇 번이고 말없이 입술을 여닫았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이마를 짚었다.
"대관식 이후로 며칠 간 대화를 나누지 못 했으니까. 에델가르트 네가 뭔가에 쫓기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내가 쫓겨……?"
"의식이 다가올수록 말수도 적어지고 불안해하는 게 보였어."
헛숨을 뱉으면서, 에델가르트는 한차례 벨레스를 훑었다. 물론 그렇겠지. 당신은 항상 나를 잘 읽었으니까. 기를 쓰고 감추려 노력했으나 그 모든 노고가 무력하게도. 벨레스 앞에 설 때마다 사그라드는 의심과 경계의식은 에델가르트 자신을 더욱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드러낼 수 있게 만들었다. 어깨 위에 인 짐과 등 뒤로 거느린 무수한 배경들로부터 유리된 채, 그저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게 되는 순간들. 정말 완전하게 제 온몸과 얼굴을 가리고 염제로서 나타나는 순간이 아닌 이상 벨레스는 항시 에델가르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도 악몽을 꾸고있나……?"
악몽. 에델가르트는 지금도 그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다. 힘없이 누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제 손목을 옥죄고, 발밑으로부터 스멀거리며 다가들어 저를 잡아당기는 그 공포들. 옆에 누워 신음하던 여리고 작은 목소리들은 지금도 귓가에 메아리 치는 듯 하고, 저를 감싸안던 혈육의 온기가 차갑게 식어 얼어붙어 가던 순간을 피부 위로 느낄 수 있다. 제 살을 가르고, 피를 뽑아내고, 뼈를 조이며, 눈물과 삶과 행복을 앗아갔던 그 더러운 그림자들. 늪처럼 제게 달라붙어 떨어져 나가지 않는 피멍울들과 질척한 오물들을. 숨 막히는 지하의 공기를 덮으며 옅게 퍼져가던 피냄새들, 그 모든 비틀린 운명과 저주스러운 순간들은 아직까지도 제게서 맴돌고 있다.
돌연 숨이 막힌다. 제 가슴께를 붙잡아 쥐어 뜯으면서, 에델가르트는 기도를 움켜쥐는 듯한 강한 압박감에 몸을 움츠렸다. 제 안에 든 게 제자리를 벗어나 떨어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속에 또아리를 튼 무언가가 심장을 붙잡아 조이면서 피를 멎게 하고, 숨결을 앗아가며, 저를 쥐어 터뜨리려 하는 듯한 고통. 피 대신 새어나온 불안과 공포가 혈관을 타고 흐르며 몸을 뒤덮는 듯하다.
"에델가르트!"
벨레스의 팔에 맥없이 흔들리면서, 에델가르트는 소리없이 틀어막힌 숨을 뱉어내려 했다. 빈 공기를 뱉어내려 몇 번이고 기침하는 사이 벨레스가 에델가르트를 세게 끌어안는다. 에델가르트는 돌연 저를 품어안는 온기에 놀라 지레 몸을 굳혔다. 그러나 이내 천천히 제 등 뒤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토해내듯 막힌 숨을 뱉는다.
삽시간에 저를 물들인 악몽의 기억에 온몸이 얼어붙은 듯한 기분으로, 등을 토닥이는 벨레스의 손길에 맞춰 천천히 숨을 가다듬는다. 벨레스가 쉬이, 하고 에델가르트를 안정시키듯 귓가에 낮은 목소리를 속삭였다. 에델가르트는 힘없이 떨리는 손으로 벨레스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가 그 어깨 위에 이마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눈 앞을 뒤덮듯 퍼져나갔던 그 악몽들이 이렇게나 빨리 물러날 수 있었던가.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에 그저 벨레스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코를 부비면서, 에델가르트는 저를 끌어안는 손길에 맞춰 아이처럼 숨을 골랐다. 타인의 온기에 기대 일시적인 안정을 바라는 것이 어찌나 우스운지 알면서도. 에델가르트는 벨레스의 품에 고개를 묻는다. 기분 좋게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떨어지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입술을 달싹인다.
"……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항상 꾸고있어……."
벨레스의 품 안에서 웅얼대듯 답을 돌려주면, 잠시 멈추는 듯한 손길이 이번엔 머리 위로 올라선다. 에델가르트는 제 뒷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그 기분 좋은 감촉에 말없이 벨레스의 어깨에 더 깊이 이마를 묻었다. 어리광 부리듯 제 선생님의 손길을 갈구하는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벗어나고 싶지가 않다. 놓지 말아달라, 멈추지 말아달라는 의미로 그저 벨레스의 옷자락만을 움켜쥐고 여린 동물처럼 이마를 문댔다. 제게 주어진 실낱같은 안정감에 기대어 잔잔한 바다의 평온함을 즐긴다.
잠시간 주어진 향락과 안온을 즐기며 눈을 감고있으면, 벨레스의 손길이 부드럽게 어깨를 따라 흘러 에델가르트의 고개를 받쳐 세웠다. 제 선생님의 손길에 따라 고개를 올리고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 하면서 에델가르트는 코가 맞닿을 듯한 거리감에 내심 놀랐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벨레스의 연녹빛 물결을 쳐다보노라면, 가슴 깊은 곳에서 퍼지는 기쁨의 파동이 저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벨레스의 반듯하고 긴 물빛 속눈썹이 파도와 같이 깜빡이고,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애정에 말이 되지 못할 찬사를 뱉는다. 복잡한 감격이 한숨처럼 흘러 새어나왔다. 그러자 벨레스가 애처롭게 눈을 찌푸리며 에델가르트의 볼을 짚는다.
"……괜찮다면 밤 내내 같이 있어도 될까?"
"……지금, 무슨 소리야……?"
"악몽을 꾸면 깨워주겠다. 옆에 사람이 있다면 괜찮을지도 몰라. 사실, 예전부터 그렇게 해주고싶었다."
당신이 곁에 있으면 물론 악몽이야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동시에 잠도 오지 않을 것이 선해서 에델가르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옆에 벨레스를 둔 채 잠들 수도 없을 뿐더러 이제 와서 그러기도 웃기지만 무방비하게 잠들어있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에델가르트. 내가 도울 수 있게 해줘."
그러나 떨어져내리는 말과 동시에 벨레스가 저를 끌어당겨 다시 안을 때에는, 어째서인지 반항할 수가 없었다. 에델가르트는 하염없이 벨레스의 목에 제 이마를 묻고 말없이 눈을 감았다. 도와주겠다는 이 단순한 한마디를 누군가에게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태껏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홀로 일어서 홀로 걸어야 하는 길에 누군가 손을 내밀어줬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안심이 될 수 있다니. 안도감에 저도 모르게 고이는 눈물에 놀라 코를 훌쩍이면서, 에델가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 벨레스가 에델가르트를 안은 채 걷는다. 품 안에 안겨 뒷걸음질 하는 새에 잠자리로 인도되고, 벨레스의 팔이 이끄는 대로 침소에 몸을 눕히면서도, 에델가르트는 벨레스의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제게서 떨어지지 않는 작은 손에 못내 웃음지은 벨레스가 에델가르트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 감싸안는다. 에델가르트는 눈물 고인 눈으로 벨레스를 올려다보다가, 이윽고 제 눈을 덮는 선생님의 손 아래에서 얌전하게 눈을 깜빡였다.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에델가르트의 속눈썹에 벨레스가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가까이서 울린다. 눈물이 고인 제 눈가를 훔치는 손가락에 놀라 몸을 떨면, 뒤이어 벨레스의 숨결이 에델가르트의 이마 위로 흩뿌려졌다.
"괜찮아, 에델가르트."
부드럽게 속삭이는 끝에 제게 내려앉는 입술. 에델가르트는 따뜻한 입술을 음미하면서, 제 눈을 가린 벨레스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끌어내렸다. 점차 밝아지는 시야로 제 이마 위에 키스하는 벨레스를 천천히 올려다보면서, 그 경건하고 고아한 얼굴에 감격하여 손을 뻗어 벨레스의 볼을 쓸어내린다. 이마 위로 나앉은 입술은 금방 멀어졌지만 이윽고 둘의 눈은 서로에게 이끌린 것처럼 맞닿아 더더욱 가까워진다.
에델가르트는 제게 쏟아져내리는 낯선 시선을 음미하면서 벨레스의 입가를 부드럽게 엄지로 쓸어내렸다. 본능적으로 침을 삼키며 그 선연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졌을 때. 그 순간 에델가르트는 벨레스의 눈에서 번쩍이는 광채를 볼 수 있었다. 어떤 감정이 폭풍처럼 쏟아져나와 낮게 가라앉아있던 눈을 물들이는 그 강렬한 순간을. 하얀 종이 위에 잉크를 뿌린 것처럼, 서서히 요동하던 불씨가 눈동자 속에서 번지고 불꽃처럼 피어나는 놀라운 광경을 매혹된 것처럼 바라본다. 에델가르트는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듯한 감정의 향연에 놀라 저도 모르게 손을 떨었다.
벨레스가 고개를 숙인다. 누가 먼저였는지도 모르는 새, 둘은 서로 입을 맞춘다. 애절하게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고, 벌어진 틈을 쫓아 숨결을 나눈다. 저를 쪼고 핥아올리는 벨레스의 입술은 그저 맞닿는 것만으로 심장이 뻐근했다. 간절하게 벨레스를 찾아 혀를 얽고, 제 입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열망에 맞춰 고개를 기울인다. 에델가르트는 저를 잡아먹을 듯이 덮쳐오는 키스에 기쁨으로 몸을 떨면서 본능적으로 벨레스를 끌어당겼다. 잠자리 위로, 에델가르트의 위로 올라앉아선 벨레스가 입술을 핥으며 눈을 찌푸리면, 등골을 관통하는 짜릿함에 그저 탄성을 뱉는다. 벨레스가 제 몸 위에서 갈 길을 잃고 떠도는 에델가르트의 손을 붙잡아 그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고, 에델가르트를 아래에 둔 채 무릎을 내린다.
에델가르트는 어느 새 제가 벨레스의 아래에 누워있음을, 그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 갇혀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어떤 상념도 지금 이 순간에는 차오르지 않는다. 그저 다시 벨레스의 입술을 쫓아서, 제게서 멀어진 얼굴을 끌어당기고 다시금 입 맞추기를 간절히 원할 뿐이다.
"……선생님……."
떨려나오는 제 목소리에 홀린 것처럼 벨레스가 다시 눈을 맞춘다. 불꽃이 뚝뚝 떨어져내리는 눈빛으로 저를 태울 것처럼 응시하면서, 벨레스가 고개를 숙인다. 내게서 멀어지지 마. 여즉 불이 뛰노는 벨레스의 눈이 한차례 에델가르트를 훑는다. 벨레스의 눈이 와닿는 모든 곳이 마치 데인 것처럼 달아올랐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열기에 안달이 나서 이번엔 에델가르트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저를 지켜보듯 관망하는 벨레스의 입술을 두드리고, 부드러운 입술을 제 입술로 약하게 물어 흔들면서, 애원하듯 벨레스의 뒷목을 쓰다듬는다. 그러면 에델가르트는 제 귀를 파고들어오는 낮은, 그 무엇보다 뜨거운 한숨을 들을 수 있다. 끓어오르는 것처럼 짧게 신음하던 벨레스가 이윽고 재게 응해 입술을 빨아들인다. 뒷머리에서부터 후끈 번져가는, 머리를 울리는 열기에 맥을 추지 못하면서도, 에델가르트는 놓칠 새라 벨레스의 키스를 쫓는다.
그저 온기만을, 조금 더 깊게 닿을 수 있기를, 오래도록, 이 뜨거운 열기가 사라지기 않기를. 뱃속에서부터 울렁거리는 열감에 주체할 수 없는 신음이 흘렀다. 그러나 그 작은 소리는 금세 벨레스의 입 속으로 먹혀 사라져버리고 한 줌의 여유조차, 틈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저를 뒤덮어내리는 살결에 부딪쳐 산산이 흩어져나간다. 벨레스의 손이 제 옷을 풀어헤치고 스쳐가는 손길이 맞닿는 곳마다 미열이 붙는다. 이내 옷자락 안으로 파고들어온 손이 제 허리를 어루만지고, 에델가르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며 상체를 틀었다. 덕분에 비껴간 입술은 다시 저를 찾는 벨레스에게 붙잡혀 금방 얽매이지만. 뒤따라 흘러가며 배꼽 위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재차 길을 벗어난 입술이 헛숨을 뱉는다. 에델가르트는 다리를 덜덜 떨면서 막힌 숨을 뱉고, 제 허리와 배를 쓸어내리는 벨레스의 손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고작 두어 번 스쳤을 뿐인데 발끝에서부터 돋아올라온 전율에 온 몸이 요동치는 듯 하다.
"……에델가르트, 그만 하길 원하나……?"
에델가르트는 저를 내리쬐는, 욕망이 번져 흘러넘치는 벨레스의 눈길을 느낀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그 최초의 감정, 벨레스의 눈을 통해 번져 제게까지 퍼져버린 감정. 이제는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정욕. 힘없이 저를 붙잡은 손에 몸을 움츠리면서 벨레스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다. 넘실대는 감정으로 흔들리는 눈동자, 부드럽게 내리감기는 속눈썹과 잔뜩 찌푸려져 내려간 눈썹, 입술을 여닫는 모든 몸짓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아쉬움이 외려 에델가르트를 기쁘게 한다. 당신도 나를 바라는구나, 내가 그리는 만큼이나 나를 소원하는구나.
"……선생님……."
벨레스를 찾는 제 가라앉은 목소리에 스스로 놀라면서, 에델가르트는 눈을 질끈 감는다. 에델가르트는 언제고 준비되어 있었다. 항상 벨레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그 단단한 팔을 끌어안을 수 있기를, 제 품 안에 다가선 손을 놓치지 않기를 기원했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을 거절할 수 있을까.
"……그냥, 놀랐을 뿐이야, 멈추지 않아도 돼……."
안아줘, 마지막 말을 소리없이 속삭이면서, 에델가르트는 벨레스의 손을 제 가슴으로 이끌었다. 덧붙일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부끄러움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미친듯이 뛰어대는 제 심장 위에 잡은 손을 올려놓는다.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제 움직임을 눈에 담던 벨레스가 주저하며 가슴을 짚는다. 천 위로 단순히 훑어갈 뿐인 움직임인데도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에델가르트는 제 옷을 하나하나 끌러내리는 벨레스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떨리는 손으로 장갑을 벗어던졌다. 제 맨 몸을 보여주는 일이 두려워서 입술을 짓씹으면서도, 벨레스가 온전한 저를 알아줬으면 하는 상반된 마음이 뒤얽힌다.
마침내 희미한 촛불 빛 아래에서 제 모든 것을 내보이게 되었을 때. 에델가르트는 벨레스의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을, 이내 아픔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어쩔 줄 몰라하는 손이 제 상처 위를 덮고 눈물 흘리듯 떠는 것을 보았다. 혹시나 아플까 하여 제 흉 위를 손끝으로 거닐며 조심스레 아로새긴다. 불안에 떨던 마음과는 달리 그 사려깊은 손길은 간지럽기까지 해서, 에델가르트는 잘게 몸을 떨며 벨레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몇 번인가 입술을 깨물고 눈을 떨던 벨레스가 곧 에델가르트의 흉터 위로 입을 맞춘다. 우둘투둘하게 돋아난 흉진 살 위에 느리게 입 맞추고 상처 위를 따라 덧그림을 그리듯 키스를 잇는다. 심장부터 이어진 기다란 흉터를 입술로 훑고 그 위에 따뜻한 숨결을 뿌려내면서, 흉이 멎는 곳에 다다라서는 여리고 부드러운 살 위를 약하게 빨아들이고 입술로 깨문다.
배꼽께를 맴도는 키스에 에델가르트는 덜컥 숨을 집어삼키고 몸을 비틀면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여린 살 위를 노니는 혀가 뜨거운 한숨을 동반하며 춤을 추고, 촉촉한 입술이 저를 약하게 깨물 때마다 속이 아릿하고 다리 사이가 쓰라려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벨레스는 멈추지 않고 아래로, 더욱 깊이 키스를 이어가며 에델가르트를 잡아당긴다. 무릎 뒤로 손을 넣어 오므라드는 다리를 벌리고 파르르 떨리는 엉덩이를 부여잡아 살을 누르며 붙잡는다. 제 다리 사이로 벨레스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그 더운 숨결이 허벅지 안쪽에 쏟아져내리기 시작했을 때. 이제 에델가르트도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무릎 위부터 예민한 살을 타고 안 쪽으로 점차 불을 붙이며 올라오는 혀와, 입술. 동시에 제 허리와 배를 쓰다듬고, 허벅다리를 잡아쥐는 손길에 어찌할 바 없이 요동하는 사이. 끝끝내 그 불꽃같은 숨결이 에델가르트의 끝으로 와닿는다.
에델가르트는 한 손으로 제 입술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 그저 벨레스의 머리카락을 그러쥐며 제 손가락 사이로 신음과 비명을 흘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컹하고 매끄러운 혀와 입술이 제 안팎을 빨아들이고, 물어 흔들고, 노닐기 시작한다. 가히 온몸이 뒤흔들리는 듯한 충격과 성감에 숨이 무너지고 생각마저 흐트러진다. 다리 사이에서부터 퍼진 열이 삽시간에 제 몸을 관통하고, 휘몰아치며 에델가르트를 휘젓기 시작는다. 제 손가락을 깨물어 터져나오는 한숨을 참고, 도망하고자 다리를 비틀며 몸을 세우려 하면, 제 허벅지를 잡아당기고 누르는 손길에 맥없이 쓰러진다.
정도를 넘어 정신이 아찔할 정도의 자극에 힘없이 흔들리고 놀아나면서, 에델가르트는 거의 울듯이 벨레스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제 입술과 손가락을 깨물었다.
"……아, 아……선, 생님……."
귓가에 울려퍼지는 물소리와, 숨소리와, 무너지는 제 목소리가 진짜 같지 않다. 꿈결처럼 몽롱한 가운데 분명하게 저를 꿰뚫는 유일한 감각에만 의지해 부유하면서 에델가르트는 하염없이 흐느끼며 녹아내렸다. 압도적일 정도로 저를 뒤덮는 충만함에 전율하고, 터질듯이 달리는 심장과 감각에 둘러싸여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쓰러져내린다.
탈력으로 무너져 저를 치고나가는 잔열에 무력하게 흔들리면서, 에델가르트는 맥없이 눈을 감았다. 세상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 제 몸 안에 갇힌 채 돌다가 마침내 통째로 허물어지는 이 느낌. 힘없이 이마를 짚고 망연하게 눈을 깜빡이다 보면, 제 앞에서 벨레스가 얼굴을 닦고있는 것이 보였다. 떨리는 손을 뻗어 벨레스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살풋 웃는다. 정신이 하나도 없고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으나 모든 순간 저를 감싸안았던 따뜻함과 행복은 여즉 남아 기쁘게 맴돌고 있었다.
"……아픈 곳은 없나?"
"……하, 선생님. 나는 도자기 인형이 아니야."
"인형만큼 예쁘지만."
말을 잃어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에델가르트는 어이없이 새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저를 끌어안는 벨레스의 품에 고개를 묻고 숨죽여 웃으면서, 어느 새 터럭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제 불안을 깨닫는다. 에델가르트는 저를 포근히 감싸안는 장막과 같은 따스함에 파묻혀 안온을 구했다.
"악몽 없이 잠들 수 있을 것 같나?"
"덕분에, 선생님. 고마워, 나를 선택해줘서."
벨레스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린다. 가슴 위에 놓인 제 고개도 웃음을 따라 흔들린다. 뒤이어 에델가르트는 제 뒷머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을 느꼈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온기에 맞춰 눈을 깜빡인다. 누군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준다는 게 이리도 기분 좋은 일인지는 몰랐다. 여태껏 이 좋은 감각을 몰랐다는 게 아쉽기까지 할 지경이다.
"아프게 했다면 미안하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제 어깨 위를 어루만지며 멎는다. 성묘에서 벨레스에 의해, 천제의 검에 찔렸던 바로 그 자리. 힐러들의 마법으로 부상은 금방 회복 되었지만 사실 다소 갑갑하고 뻐근한 느낌은 미미하게나마 남아있었다.
"선생님, 사과할 필요 없어."
하지만 아무래도 좋아. 벨레스를 얻는 대가가 이러한 상처라면 에델가르트는 몇 번이고 다시 칼에 찔려도 상관없었다. 당신이 나와 함께 해준다면 아무리 아프다 한들 문제가 되지 않아. 몸의 상처는 언제고 새 살이 돋아 낫기 마련이지만. 당신과의 길이 끊어지는 순간 부서져나간 내 마음은 결코 낫지 않았을 테니까.
눈을 감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이뤄야 할 과업과 막막한 미래가 저를 집어삼키지만, 벨레스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에델가르트는 그 모든 위협으로부터 숨을 돌릴 수 있다. 외로운 길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안도로 숨을 내쉬면서, 에델가르트는 조심스럽게 벨레스를 끌어안았다. 제게 뻗어준 두 손을, 두 팔을 다시는 놓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면서.
- 19.10.18